01
제1장: 맞댄 등
불길이 마른 서까래를 갉아먹으며 튀어 오르는 불티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팽악의 호령에 맞춰 짓쳐든 현검문 정예 무사 네 명이 장검을 비스듬히 눕히며 청운의 전후좌우를 옥죄었다. 살을 에는 듯한 검기가 마당의 흙먼지를 둥글게 말아 올렸다.
"등을 보여선 안 된다!"
백연의 서늘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림과 동시에, 낡은 흑포 자락이 허공을 갈랐다. 이가 빠진 검을 역수로 쥔 백연이 번개처럼 청운의 뒤편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등줄기에 닿은 얇은 옷감 너머로 아직 아물지 않은 자상의 열기와 거친 맥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둘 사이에 오간 시선은 없었으나, 맞닿은 견갑골을 축으로 두 자루의 검이 정반대의 방향을 겨누었다.
"좌측 셋, 발목을 노린다!"
백연의 낮게 가라앉은 경고와 함께 쇄도해 온 세 자루의 검날이 청운의 하체를 베어 들어왔다. 화려하게 굽이치는 현검문의 칠십이수 비검 수법이었다. 청운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른발을 반 보 내딛으며 정자보의 무게중심을 지면 깊숙이 박아 넣었다. 아침나절 백연의 지적으로 수평을 찾은 오른쪽 팔꿈치가 흔들림 없이 가슴팍을 가로질렀다.
챙-!
무딘 철검의 검등이 허공을 찌르는 쾌검 세 자루의 교차점을 단번에 후려쳤다. 정직한 궤적으로 내뻗은 직선의 힘은 잔재주로 얽힌 칼날들을 한꺼번에 튕겨냈다. 상대 검수들의 손목이 꺾이며 칼끝이 위로 솟구친 바로 그 찰나였다. 청운의 어깨너머로 백연의 이 빠진 검이 그림자처럼 쏘아져 나갔다.
쉬이익!
백연의 칼날이 불꽃을 가르며 허점이 노출된 무사들의 팔목 인대를 빗겨 쳤다. 비명과 함께 장검 세 자루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뒤편에서 청운을 기습하려던 마지막 무사 역시 백연의 팔꿈치에 턱을 강타당하고 허물어졌다. 등을 맞댄 두 사람의 호흡은 거친 불바람 속에서도 물 흐르듯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제법 손발이 맞는군. 애송이치고는 배짱이 두둑해."
백연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턱 끝에 맺힌 땀방울을 털어냈다. 청운은 대답 대신 철검의 칼날을 정면으로 세웠다. 눈앞에는 푸른 비단 장포를 펄럭이며 쌍검을 비틀어 쥔 팽악이 시퍼런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02
제2장: 직선과 곡선
팽악이 마른기침 같은 냉소를 터뜨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의 양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쌍검의 기세는 졸개들과 차원을 달리했다. 왼손의 검은 구렁이처럼 똬리를 틀며 시야를 어지럽혔고, 오른손의 검은 먹이를 노리는 독사처럼 차갑게 숨을 죽이고 있었다.
"잔챙이 몇을 넘겼다고 우쭐대지 마라. 벽력문의 버러지 같은 찌르기 따위, 이 유운쌍검(流雲雙劍) 앞에서는 허수아비의 볏짚에 불과하니!"
팽악의 신형이 불길 속에서 일렁였다. 눈앞에 떠오른 것은 한 자루의 검이 아니라 사방을 찢어발기는 십여 개의 검영(劍影)이었다. 붉은 불빛을 반사하며 어지럽게 회전하는 쌍검의 궤적은 청운의 사지를 통째로 도려낼 듯이 몰아쳤다. 현검문 간부 특유의 현란한 곡선 검결이었다.
백연이 급히 검을 뻗어 지원하려 했으나, 팽악이 휘두른 칼바람의 여파에 밀려 환부를 감싸 쥐며 뒤로 물러섰다. 백연의 입술 사이로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현혹되지 마라! 곡선의 끝은 결국 중심을 향한다!"
청운은 눈을 가늘게 떴다. 마당의 검흔을 밟고 선 발바닥에서부터 단전을 지나 어깨까지, 스승이 수만 번 다잡아주었던 정자보의 축이 하나로 연결되었다. 화려하게 허공을 메우는 현검문의 검영은 눈부셨으나, 그 화려함의 중심에 뻗어 있는 살점과 뼈대는 결국 한 사내의 몸뚱이에 불과했다.
귀를 찢는 파공음이 정수리에 닿는 찰나, 청운은 칼을 휘두르지 않았다. 도리어 오른발을 단 반 치 앞으로 밀어 넣으며 상체를 낮추었다. 그리고 가장 단순한 상단 베기의 궤적으로 철검을 곧게 치켜올렸다.
파아앙!
바람을 가르는 건조하고 묵직한 마찰음이 일었다. 어지럽게 허공을 수놓던 팽악의 화려한 쌍검 궤적 한가운데로, 청운의 무딘 철검이 군더더기 없는 수직선 하나를 정확히 그어 올렸다. 온갖 현란한 곡선들이 부딪쳐 나간 곳은 철검의 중심축이었다.
콰직!
날카로운 쇠붙이가 부러지는 굉음과 함께 팽악의 왼손 검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청운의 철검은 멈추지 않고 그대로 아래로 떨어져 내리며 팽악의 오른손 손목을 묵직하게 내리쳤다. 뼈가 어긋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나머지 검마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크아아악!"
팽악이 찢어지는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뒹굴었다. 마당을 가득 채우던 검풍이 거짓말처럼 흩어지고, 잿더미와 불꽃만이 두 사람 사이에 스산하게 흩날렸다.
03
제3장: 불길 속의 자백
패배한 정예 무사들은 처참하게 쓰러진 팽악을 보고 공포에 질려 산문 밖으로 허겁지겁 달아났다. 백연은 바닥에 뒹굴던 횃불을 흙더미로 덮어 끄고, 서고 처마에 번지던 불길을 마당 우물가에 있던 물항아리를 깨뜨려 단숨에 진압했다. 타는 냄새와 검은 연기가 가라앉자 마당에는 신음하는 팽악과 두 무인만이 남았다.
청운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부러진 손목을 쥐고 떠는 팽악의 목덜미 반 치 앞에 철검을 겨누었다. 붉은 불빛 속에서 가라앉은 청운의 눈동자는 서늘했다.
"산적을 앞세워 도량을 빼앗으려 하고, 이제는 불까지 질렀소. 현검문 같은 거대 문파가 왜 이토록 뼈대만 남은 벽력문을 없애지 못해 안달인 것이오?"
팽악은 이를 악물며 침을 뱉으려 했으나, 곁으로 다가온 백연이 이 빠진 칼끝으로 팽악의 쇄골을 지그시 짓눌렀다. 백연의 흑포 자락 사이로 차가운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숨길 것 없다, 팽악. 너희 문주 사도협이 왜 이 외딴 산골까지 정예를 보냈는지 그 입으로 토해내라. 내 등에 칼을 꽂았던 그 푸른 독기의 출처도 함께."
팽악의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었다. 백연의 눈빛에 서린 살기와 청운의 흔들림 없는 칼끝이 목구멍을 틀어막고 있었다. 팽악은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거친 숨을 토해냈다.
"사, 사도협 장로님께서… 시키신 일이다! 너희 벽력문의 암반에 새겨진 시조의 검맥뿐만이 아니야… 도량 깊숙이 숨겨진 '벽력신표(霹靂神標)'를 강탈해야만 대파의 비전과 결합할 수 있다고 하셨다!"
청운의 눈썹이 꿈틀했다. 스승이 임종 직전 남겼던 유언, 도량의 돌 하나 기와 한 장도 건드리지 말라던 그 당부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었다. 청운의 목소리가 낮게 잦아들었다.
"…스승님은 지병으로 돌아가셨소. 그분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팽악이 실성한 듯 헛웃음을 터뜨리며 바닥에 머리를 짓이겼다.
"지병? 크큭… 어리석은 애송이 놈. 그 늙은이가 끝내 신표의 행방을 실토하지 않아서… 사도협 장로님께서 진산포의 탕약에 삼일소혼독(三日銷魂毒)을 타도록 사주하셨다! 목덜미에 푸른 피가 맺혀 피를 토하고 죽어간 것은 그 독 때문이란 말이다!"
스승의 석연찮았던 임종, 목덜미에 남아 있던 기이한 푸른 어혈의 진실이 팽악의 입을 통해 적나라하게 까발려졌다. 청운의 손에 쥐인 무딘 철검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팽악의 목에 닿은 서슬 퍼런 쇳빛 위로, 도량의 밤바람보다도 차가운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5화 끝 · 여기까지가 폴린이 써 둔 이야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