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제1장: 들이닥친 칼날
사흘 전 올린 흙무덤의 떼는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해 푸석거렸다. 청운은 거친 삼베 상복 소매를 걷어붙이고 허리춤의 무딘 철검을 고쳐 매었다. 향로에 꽂아 둔 세 줄기 향 연기가 산바람에 흩어지기도 전에, 바깥마당의 썩은 목책이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박살 났다.
"스승 놈 시체는 잘 묻었느냐, 애송아!"
목책 파편을 짓밟으며 성큼 걸어 들어온 사내는 흑호채의 두목, 번충이었다. 어깨에 큼직한 박도를 멘 그의 등 뒤로 험상궂은 산채 무리 일곱 명이 마당을 에워쌌다. 번충은 침을 퉤 뱉어 무덤 앞 향로 옆에 갈기더니 품속에서 구겨진 기름종이 한 장을 꺼내 펄럭였다.
"네 늙은 스승이 진산포 객잔에서 밀린 술값에 탕약값까지 합쳐 은자 백 냥이다. 시체가 썩기도 전에 받아내야겠는데, 가진 돈이 없으면 이 터라도 넘겨야지. 오늘 부로 여긴 우리 흑호채의 새 거점이다."
청운은 무덤 앞을 가로막고 서서 번충을 응시했다. 검게 탄 얼굴에 새겨진 흉터, 거친 숨소리와 함께 풍기는 역한 기름 냄새. 청운의 손이 낡은 목제 검자루 위로 천천히 내려앉았다. 손가락 마디마다 박힌 굳은살이 차가운 나무 표면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스승님께선 지난 반년간 거처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셨소. 진산포 객잔은커녕 마당의 우물물조차 긷지 못하셨는데 백 냥이라니, 억지도 정도껏 부리시오."
번충이 코웃음을 치며 박도를 어깨에서 내렸다. 묵직한 쇳덩이가 흙바닥을 내리찍으며 둔탁한 진동을 울렸다. 무리들이 낄낄거리며 청운의 퇴로를 막아섰다.
"강호 바닥에서 주먹 센 놈이 쓴 장부가 곧 법인 것을 정녕 모른단 말이냐? 명색이 문파랍시고 간판만 걸어둔 이 거지 소굴에서, 너 같은 풋내기가 뭘 어쩌겠다고 버텨? 순순히 인장을 내놓지 않으면 저 흙더미를 파헤쳐 네 스승 대가리를 효수하겠다."
청운의 눈썹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산바람에 나뭇가지들이 스산하게 흔들렸고, 그는 조용히 검집의 걸쇠를 엄지로 밀어 올렸다. 짤깍 하는 맑은 금속음이 번충의 천박한 웃음소리를 갈랐다.
"문파의 산문이오. 칼을 거두고 물러나지 않는다면 더는 예의를 차리지 않겠소."
"말귀를 못 알아먹는 쥐새끼로군! 손가락부터 하나씩 잘라주마!"
번충의 고함과 함께 양옆의 졸개 둘이 먼저 도를 빼 들고 쇄도했다. 칼날이 허공을 가르며 날카로운 파공음을 냈다.
02
제2장: 일보의 직선
달려드는 두 사내의 보법은 어설펐고 칼날의 궤적은 거칠었다. 청운은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지난 수년간 마당의 고목을 상대로 수십만 번 거듭해 온 기초 검결의 첫 장, 정자보(正字步)의 중심축이 청운의 디딤발에 정확히 실렸다.
촤악!
철검이 검집을 빠져나오는 순간은 번개 같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그저 똑바른 수평선 하나가 공중에 그어졌을 뿐이다. 청운이 가볍게 비껴 디딘 반 보 사이로 왼쪽 사내의 도가 허공을 갈랐고, 그 빈틈으로 뻗어 나간 검등이 사내의 손목 관절을 정확하게 후려쳤다.
"크악!"
비명과 함께 도가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청운의 철검 끝은 이미 오른쪽 사내의 쇄골 바로 앞 반 치 거리에 멈춰 서 있었다. 서슬 퍼런 쇳빛과 청운의 서늘한 시선에 사내는 침조차 삼키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물러서시오."
청운의 목소리에는 거친 숨결조차 섞여 있지 않았다. 하지만 번충은 제 부하들이 순식간에 제압당하자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대도를 치켜들었다. 힘으로 찍어 누르는 흑호채의 절기, 호권참(虎捲斬)의 기세가 칼끝에 얹혔다.
"잔재주를 부리는구나! 네놈의 그 얇은 꼬챙이로 이 칼을 막을 수 있을 성싶으냐!"
번충의 거구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도약했다. 묵직한 칼바람이 청운의 이마를 쪼갤 듯이 내리꽂혔다. 보통의 검수라면 옆으로 굴러 피하거나 화려한 방어 초식으로 칼날을 흘려내려 했을 기세였다. 하지만 청운의 선택은 달랐다.
오직 전진. 오른발이 땅을 강하게 박차며 흙을 튕겨냈다. 기복도, 꺾임도 없는 완벽한 직선의 전진 찌르기였다. 스승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천 번, 만 번을 고쳐주었던 그 유일하고도 정직한 검로였다.
번충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신의 칼이 상대의 머리를 부수기 전, 청운의 무딘 철검이 가슴팍을 먼저 뚫고 들어올 궤적이었다.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간결함에 번충은 경악하며 황급히 도신을 틀어 검끝을 쳐내려 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직선은 곡선보다 짧았고, 우직한 찌르기는 거친 휘두름보다 빨랐다.
푸욱!
"커억!"
철검의 끝이 번충의 오른쪽 어깨뼈 사이를 파고들며 뼈와 근육을 꿰뚫었다. 거친 쇳소리와 함께 번충의 대도가 힘없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청운은 검을 비틀지 않고 곧게 뽑아내며 한 걸음 물러섰다. 번충의 어깨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피가 마른 흙바닥을 적셨다.
03
제3장: 남겨진 표식
마당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번충은 바닥에 주저앉아 피를 뿜는 제 어깨를 감싸 쥐며 공포에 질린 눈으로 청운을 올려다보았다. 화려한 검초도, 거창한 내공의 빛도 없었다. 그저 남들이 무공을 배울 때 가장 처음 쥐어 잡는 찌르기 한 수에 어깨가 박살 난 것이다.
"네, 네놈… 이게 대체 무슨 검법이냐? 삼류 검문 따위의 초식일 리가 없는데…!"
청운은 검신에 묻은 피를 거친 소매로 말끔히 닦아냈다. 그의 발걸음은 조금 전보다도 침착하고 고요했다.
"벽력문(霹靂門)의 기본 검결이오. 산문을 더럽히지 말고 당장 떠나시오. 다음엔 어깨로 끝나지 않을 것이오."
청운의 무미건조한 대답에 남아 있던 산채 도적들은 질겁하며 주저앉은 번충을 부축했다. 번충은 이를 갈며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한 번의 찌르기에 완전히 기세가 꺾인 무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깨진 목책 너머 산길로 내달렸다.
그들이 허겁지겁 달아나며 흘린 거친 숨소리와 먼지가 가라앉자, 산문에는 다시 바람 소리만이 맴돌았다. 청운은 검을 칼집에 꽂아 넣고, 번충이 쓰러졌던 자리를 내려다보았다.
핏자국 옆 풀숲 사이에 손바닥만 한 쇠붙이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번충이 품속에서 기름종이를 꺼내며 흘린 물건인 듯했다. 청운은 허리를 숙여 그것을 주워 올렸다.
묵직한 한철로 주조된 철패였다. 산적들이나 뒷골목 왈패들이 들고 다닐 만한 조잡한 패가 아니었다. 뒷면에는 은밀한 지령 번호가 새겨져 있었고, 앞면 중앙에는 날카로운 검 두 자루가 교차하는 정교한 문양이 양각되어 있었다.
현검문(玄劍門).
인근 백 리 안에서 가장 거대한 세력을 자랑하며 무림 맹주를 자처하는 명문 대파의 은밀한 인장이었다. 뒷골목 도적 떼에 불과한 흑호채가 왜 갑자기 무너져 가는 이 소문파의 산문을 노리고 쳐들어왔는지, 그 배후가 선명한 쇳빛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청운은 차가운 철패의 모서리를 엄지로 문질렀다. 거대한 대파의 그림자가 이미 이 작은 도량까지 뻗쳐 있었다. 청운은 철패를 품 깊숙이 갈무리하고, 아직 흙이 마르지 않은 스승의 무덤을 향해 똑바로 돌아섰다.
1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