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제1장: 돌바닥의 비밀
현검문의 은밀한 낙인이 박힌 쇳덩이는 손바닥 안에서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청운은 무덤가에 흩어진 박도 파편과 핏방울을 조용히 흙으로 덮었다. 번충 같은 산채 두목이 백 냥이라는 터무니없는 빚을 핑계 삼아 문파의 산문을 내놓으라 윽박지른 이유가 명백해졌다. 무림 맹주를 자처하며 의기를 떠벌리는 현검문이 뒤에서 도적 떼를 부려 이 외진 도량을 집어삼키려 한 것이다.
왜 하필이면 대파의 눈에 들 것 하나 없는 이 작은 산문인가. 청운은 품에서 철패를 꺼내 햇빛에 비추어 보았다. 정교하게 새겨진 두 자루의 교차된 검형 밑에 새겨진 작은 낙관은 '매장(埋藏)'을 뜻하는 은어였다. 스승이 임종 직전 마른 손으로 청운의 옷자락을 쥐며 남겼던 말이 귓전을 스쳤다. 마당의 돌 하나, 기와 한 장도 함부로 들어내지 말라던 당부였다.
청운은 낡은 빗자루를 들고 산문 앞마당으로 향했다. 낙엽과 마른 흙더미가 수북이 쌓인 바닥을 천천히 쓸어내기 시작했다. 빗자루 끝이 둔탁한 돌 표면을 긁어낼 때마다, 수십 년간 잊혀 있던 거친 선들이 윤곽을 드러냈다. 단순한 바닥돌이 아니었다. 역대 장문인들이 목검과 진검으로 바닥을 내려치고 찌르며 새겨 넣은 검흔(劍痕)들이 질서정연하게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스승님께선 잡초가 자라도록 내버려두라 하셨지만, 숨기기 위함이었군요."
청운은 무릎을 꿇고 손끝으로 깊게 파인 돌 틈을 더듬었다. 선들은 어지러운 난무가 아니었다. 중심에서 바깥으로 뻗어나간 여덟 갈래의 직선, 그리고 그 끝에서 둥글게 원을 그리며 회귀하는 보법의 자취였다. 그 중심축은 바로 자신이 조금 전 번충을 무너뜨렸던 '정자보'의 디딤자리와 정확히 일치했다.
현검문이 노린 것은 단순히 허물어져 가는 누각이나 볼품없는 산골짜기 땅이 아니었다. 백 년 전 홀연히 사라진 벽력문의 시조가 이 도량의 기초 암반 자체에 새겨 둔 원초의 검맥(劍脈), 그 터를 통째로 차지해 자신들의 무공을 보완하려는 탐욕이었다. 청운은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마당 전체를 조망했다. 흑호채의 칼잡이들이 들이닥친 것은 그저 탐색전에 불과했다. 머지않아 정체를 숨긴 현검문의 본대나 더 악랄한 살수들이 이 자리를 짓밟으러 올 것이 분명했다.
02
제2장: 만 번의 찌르기
해가 서산 너머로 기울며 붉은 노을이 산마루를 물들였다. 청운은 허리춤에서 철검을 풀어 땅에 비스듬히 꽂아두고, 도량 구석의 헛간으로 가 묵직한 오목 몽둥이와 결계용 노끈을 꺼내 왔다. 산문 어귀의 부서진 목책을 수습하는 것만으로는 맹수나 도적을 막을 수 없었다. 침입자의 발목을 묶고 시야를 흐리는 문파 고유의 간이 경계진을 펼쳐야 했다.
소나무 기둥 사이에 삼 줄을 팽팽하게 엮고, 낭떠러지로 이어지는 샛길에는 마른 댓가지를 엮어 함정을 놓았다. 손가락 끝이 쓸려 피가 배어 나왔지만 청운은 멈추지 않았다. 홀로 남은 산문은 적막했으나, 흙을 만지고 밧줄을 당기는 청운의 몸짓에는 흔들림 없는 결기가 배어 있었다. 정비를 마친 뒤, 청운은 다시 마당 한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돌바닥에 새겨진 선들이 어스름 속에서 은은한 푸른빛을 띠는 듯했다. 청운은 목제 검자루를 쥐고 정자보의 축을 밟았다. 호흡을 단전으로 가라앉히자 스승의 마르고 거친 손길이 어깨를 짚던 감각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청운아, 검은 허공을 베는 도구가 아니다. 너의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뼈대를 허공에 밀어 넣는 일이다. 화려한 곡선에 미혹되지 마라. 천 리를 돌아가는 기교보다 제자리를 지키는 한 뼘의 직선이 백 배는 무겁다.'
쉬익!
찌르기였다. 다시 한 번, 찌르기였다. 청운의 철검이 공기를 가를 때마다 날카로운 마찰음이 도량의 정적을 깼다. 번충을 쓰러뜨렸던 그 단 한 번의 전진을 이번에는 돌바닥의 검흔을 따라 연결했다. 첫 찌르기가 끝나는 지점에서 오른발을 반 보 틀며 회전시키자, 자연스럽게 다음 궤적이 검신을 타고 흘렀다. 찌르기 뒤에 이어지는 올려베기, 그리고 물러섬이 없는 종베기.
남들은 초보자나 익히는 지루한 기초라 조롱할 동작들이었지만, 선대 장문인들이 돌바닥에 남겨놓은 궤적과 청운의 동작통이 맞물리자 검끝에서 뿜어지는 기세가 달라졌다. 백 번, 오백 번, 천 번. 청운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려 흙바닥을 적셨다. 삼베 상복이 땀으로 흠뻑 젖어 살갗에 달라붙었지만, 검로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거대한 세력의 위협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을 벽력문의 뼈대가 청운의 온몸에 단단히 아로새겨지고 있었다.
03
제3장: 계단 밑의 불청객
깊은 밤이 찾아오자 산바람이 매섭게 울부짖었다. 청운은 마지막 천 번째 찌르기를 마친 후, 가쁜 숨을 고르며 검을 거두었다. 검신에서 피어오르던 희미한 열기가 밤안개 속으로 흩어졌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단전은 오히려 맑은 기운으로 가득 찼다. 마당의 검흔을 통해 정립한 세 가지 기초 연결식은 거창한 초식이 아니었으나, 빈틈없이 단단했다.
청운은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마당 한편에 마련된 우물로 걸음을 옮겼다. 차가운 두레박물을 들이켜 마른 목을 축이던 바로 그때였다. 바람 소리 사이로 산문 아래쪽에서 희미한 파열음이 섞여 들려왔다.
자박, 털썩.
낙엽을 밟는 불안정한 발소리와 무언가 육중하게 무너져 내리는 둔탁한 소리였다. 청운의 신경이 즉각 곤두섰다. 번충의 패거리가 복수를 위해 지원군을 이끌고 돌아온 것인가. 청운은 검집에 꽂아둔 철검을 뽑아 들고, 조금 전 손수 정비해 둔 산문 입구의 계단 쪽으로 소리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달빛이 비구름 사이로 비쳐들자 가파른 돌계단이 푸르스름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계단 중턱부터 시작된 붉은 핏자국이 계단참을 따라 굵은 선을 그리며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벽력문의 허물어진 기둥 아래, 한 사내가 검을 쥔 채 엎드려 쓰러져 있었다.
남루한 흑포는 곳곳이 예리한 도검에 찢겨 나가 피범벅이었고, 사내의 등 뒤에는 치명적인 자상이 길게 그어져 있었다. 거친 숨을 헐떡이는 사내의 백발 섞인 머리칼 사이로 창백하게 질린 턱선이 드러났다. 손에 쥐고 있는 검은 날이 절반이나 이가 빠져 있었지만, 사내는 의식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칼자루를 결코 놓지 않고 있었다.
"으… 큭…."
낮은 신음과 함께 쓰러진 방랑객의 손가락이 경련하듯 떨렸다. 청운은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한 걸음 다가섰다. 사내의 옷깃 안쪽에서 번충의 것과는 다른, 그러나 분명히 무림의 피비린내를 품은 차가운 금속 장신구가 달빛을 받아 번뜩였다. 적의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상처 입은 무인을 외면할 수 없다는 도량의 규율이 청운의 굳은 눈동자 속에서 팽팽하게 부딪쳤다.
2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