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린벽력기본검 목차

무협 · 3화 / 5화 · 약 7분

제3화: 덧나는 상처와 목검

벽력기본검

01

제1장: 온돌방의 약향

청운은 계단참에 쓰러진 사내의 등 뒤로 손을 밀어 넣었다. 손끝에 닿은 흑포는 굳기 시작한 핏물로 끈적였고, 사내의 호흡은 실낱처럼 가늘었다. 적의 척후이거나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경계가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으나, 피를 흘리며 산문에 엎어진 무인을 내치는 것은 벽력문의 법도가 아니었다. 청운은 사내의 이 빠진 검을 수습하고, 늘어진 사내의 상체를 조심스레 들어 올려 등에 둘러업었다. 의식을 잃은 사내의 백발 섞인 머리칼이 청운의 어깨 위로 힘없이 늘어졌다.

도량 안쪽의 유일하게 온기가 남은 온돌방으로 사내를 옮겨 눕힌 청운은 곧장 낡은 무명천을 찢어 더운물에 적셨다. 사내의 너덜너덜해진 상의를 조심스레 걷어내자 등줄기를 따라 깊게 파인 두 줄기 자상이 드러났다. 칼날이 교차하며 살점을 헤집어놓은 상흔이었다. 청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는 단순한 도적 떼의 난도질이 아니었다. 상흔의 깊이와 각도가 일정하고, 상처 가장자리가 푸르스름하게 죽어 있는 것은 현검문 직속 정예들이 구사하는 특유의 쾌검 수법이었다.

사내의 옷깃 안쪽에서 덜컹거리던 은색 패찰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청운이 그것을 집어 들자 손바닥에 서늘한 한기가 감돌았다. 번충이 지니고 있던 거친 한철 패와는 결이 달랐으나, 뒷면에 음각된 밀서 암호의 서체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 분명했다. 현검문이 소문파를 멸문시키려 했던 진짜 이유와 스승의 석연찮은 병사(病死) 뒤편에 도사린 배후가 이 사내의 피 흘리는 상처와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 스승의 임종 당시 목덜미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푸른 어혈과 이 사내의 등 뒤에 번진 푸른 독기운은 놀라울 만큼 닮아 있었다.

의혹이 꼬리를 물었으나 청운은 생각을 가라앉혔다. 지금은 따져 물을 때가 아니라 목숨을 붙잡을 때였다. 청운은 광간으로 달려가 스승이 생전에 갈무리해 두었던 지혈초와 백초환을 꺼내 왔다. 돌절구에 약초를 짓찧어 진물을 내고, 거친 손길이나마 정성을 다해 사내의 찢긴 등판에 두껍게 펴 발랐다. 독기를 빨아들이는 약초의 쓴 내가 좁은 방 안에 자욱하게 번져 나갔다. 약 기운이 스며들자 사내의 굳어 있던 미간이 미약하게 풀리며 거친 숨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부엌 아궁이에 장작을 지펴 탕약을 안친 청운은 사내의 머리맡에 더운물을 담은 사발을 놓아두었다. 새벽닭이 울기 전까지 사내의 맥박은 여전히 위태로웠으나, 적어도 죽음의 문턱에서 반 걸음은 물러선 듯했다. 청운은 땀에 젖은 이마를 훔치며 방 안의 촛불 심지를 낮추었다. 방랑객의 감긴 눈꺼풀 아래로 어떤 사연이 묻혀 있든, 도량의 문을 두드린 목숨을 외면하지 않는 것만이 자신이 지켜야 할 첫 번째 계율이었다.

02

제2장: 삼천 번의 궤적

백연이 의식을 되찾았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코끝을 찌르는 씁쓸한 약초 냄새와 등 뒤를 감싸는 묵직한 온기였다. 남루한 천장에 박힌 서까래, 흙벽 틈으로 스며드는 새벽빛. 자신이 아직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비현실적이었다. 백연은 이를 악물며 상체를 일으키려 했으나 찢어질 듯한 고통에 신음을 삼키며 다시 베개에 머리를 뉘었다. 등 뒤의 치명상은 놀라울 만큼 정갈하게 지혈되어 있었고, 머리맡에는 아직 온기가 남은 탕약 사발이 놓여 있었다.

스스로를 거두어 준 자가 누구인지 가늠하기도 전에, 창호지 문 너머 마당에서 일정한 파공음이 바람을 가르고 들려왔다.

쉬익, 츠읏. 텁!

규칙적이고 건조한 소리였다. 어떠한 화려한 기교도, 현란한 내력의 파동도 실려 있지 않은 순수한 찌르기의 파열음. 백연은 의혹 어린 눈빛으로 문갑을 짚고 비틀거리며 기어갔다. 손끝으로 문풍지를 살짝 뚫어 마당을 내다본 백연의 백발 섞인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마당 한가운데에 한 청년이 거친 삼베옷을 입은 채 검을 쥐고 홀로 서 있었다.

청년은 오직 하나의 동작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오른발을 반 보 내딛으며 정면을 향해 목검을 곧게 뻗고, 다시 숨을 들이쉬며 제자리로 회수하는 극히 기초적인 찌르기였다. 번드르르한 문파의 도동들도 열흘이면 질려 그만둘 만한 무미건조한 기본기를, 청년은 이마에 비 오듯 땀을 흘리면서도 흔들림 없이 밀어 넣고 있었다.

'천 번… 아니, 이미 수천 번을 거듭한 흔적인가.'

백연은 청년의 발밑을 보았다. 돌바닥에 새겨진 깊은 검흔을 따라 청년의 짚신 바닥이 정확히 같은 자리를 밟으며 흙먼지를 털어내고 있었다. 발바닥이 닿는 바닥돌은 이미 반질반질하게 닳아 있었고, 목검이 허공을 찌르는 지점은 모래알 하나 벗어나지 않을 만큼 정밀했다. 백연의 입가에 냉소와 기이한 허탈함이 동시에 번졌다. 자신을 쫓던 현검문의 살수들은 현란한 칠십이수 비검으로 사람의 목숨을 베어 넘겼다. 그 잔혹하고 정교한 강호의 칼바람 속에서, 이 외딴 산골의 청년은 땔감이나 다름없는 목검으로 모래성을 쌓듯 무모한 짓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백연은 과거 믿었던 동문들의 배신과 피비린내 나는 참극을 떠올렸다. 힘이 없으면 짓밟히고, 잔꾀가 부족하면 목이 달아나는 것이 무림의 섭리였다. 저토록 정직하고 미련한 찌르기로 무엇을 지킬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비웃음이 목구멍을 타고 오르기도 전에, 청년의 목검 끝에서 뿜어지는 기이한 묵직함이 백연의 시선을 붙들어 매었다. 백 번, 오백 번이 지나도 검로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어리석을 정도로 곧은 그 궤적은 백연의 메마른 심장에 생경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03

제3장: 멈춰 선 목검

아침 안개가 걷히고 햇살이 도량의 깨진 기와를 비출 무렵, 청운은 마침내 삼천 번째 찌르기를 내뻗었다. 목검 끝이 허공의 한 점에 정확히 멈춰 서며 묵직한 잔향을 남겼다. 청운의 거친 삼베 상복은 땀으로 흠뻑 젖어 살갗에 달라붙어 있었고, 검을 쥔 손가락 마디마디에서는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단전에 모인 기운을 가라앉히며 목검을 천천히 거두어들이던 청운은, 툇마루 쪽에서 들려오는 마른 기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문을 열고 나온 백연이 기둥에 등을 기대고 앉아 청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 백발이 흩날렸지만, 청운을 응시하는 눈빛만은 칼날처럼 서늘했다.

"몸을 움직이시면 상처가 다시 벌어집니다."

청운이 목검을 허리춤에 차고 수건으로 목덜미의 땀을 닦으며 다가섰다. 그의 어투는 무덤덤했으나 목소리에는 환자를 향한 최소한의 배려가 담겨 있었다. 백연은 청운의 굳은살 박인 손과 무딘 목검을 번갈아 훑어보더니 메마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현검문의 흔적을 보았을 텐데. 내가 누구인지, 왜 쫓기는지도 묻지 않고 거둔 이유가 무엇이냐. 그 패거리가 이곳까지 들이닥치면 네깟 풋내기 하나쯤은 뼛가루도 남기지 못하고 도륙당할 것을 모르는가?"

불신과 가시가 돋친 질문이었다. 세상의 모든 친절 뒤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고 믿는 자의 눈빛이었다. 청운은 마당 우물가로 가 두레박을 내려 찬물을 길어 올렸다. 바가지에 물을 담아 백연에게 건네며 청운이 담담하게 답했다.

"벽력문의 산문 계단에서 쓰러진 자를 치료했을 뿐이오. 칼을 품고 계단을 오른 이유가 어떠하든, 숨이 붙어 있는 무인을 거두는 데에는 조건이 필요치 않소. 마시시오."

백연은 건네받은 물바가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청운의 눈동자에는 어떠한 탐욕도, 대파의 보복을 향한 비굴한 공포도 없었다. 오직 스승을 잃은 뒤 홀로 산문을 지키며 다져온 단단한 바위 같은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백연은 바가지의 물을 단숨에 들이켜 타는 목을 축였다. 찬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흐릿했던 정신이 또렷해졌다.

청운이 빈 바가지를 받아 들고 다시 마당 한가운데로 돌아서려던 찰나였다. 백연이 앙상한 손가락을 들어 올려 청운의 허리춤에 꽂힌 목검 끝을 가리켰다.

"성실하더군. 하지만 그 찌르기, 반 보를 내딛을 때 오른쪽 팔꿈치가 미세하게 아래로 쳐져. 칼끝이 반 푼 떨린단 뜻이다. 진정한 일류 고수 앞이라면 그 찰나의 틈에 심장이 세 번은 꿰뚫릴 궤적이야."

청운의 발걸음이 뚝 멈추었다. 서늘한 바람이 마당의 검흔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3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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