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부러진 그릇
사당의 낡은 나무 문짝이 갈라지며 굉음과 함께 박살 났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사이로 거친 욕설과 함께 날카로운 쇳소리가 앞마당의 적막을 단숨에 찢어발겼다. 연서진은 숨을 가다듬으며 손에 쥔 낡은 흑단목검의 손잡이를 단단히 쥐었다. 손바닥에 배어든 땀방울이 거친 나무 결을 따라 스며들었다.
아랫배 안쪽, 한때 내력이 샘솟던 단전은 차갑게 식어 굳은 지 오래였다. 깨져 버린 단전은 기운을 품지 못했고, 그 때문에 이전 문파에서 쫓겨나 마침내 이곳 백운검파의 퇴락한 산문까지 흘러들어왔다. 힘줄과 근육의 뻐근한 긴장만이 그가 세상에 온전히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밑천이었다. 서진은 바닥에 흩어진 흙먼지를 밟으며 천천히 호흡의 주기를 낮췄다. 들이쉬는 숨에 흙내음이 섞여 들었고, 내쉬는 숨에 잡념이 떨어져 나갔다.
"야, 이 망해 자빠진 문파에 아직도 숨 쉬는 버러지가 남아 있었네?"
부서진 문간을 성큼 넘어선 사내는 어깨에 큼직한 귀두도를 걸친 흑호방의 건달이었다. 푸르스름한 문신이 목덜미를 뒤덮은 사내의 뒤로 세 명의 무리가 흉흉한 칼날을 번뜩이며 마당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의 발길질에 뜰 한구석에 쌓아 두었던 기와 조각들이 요란하게 깨져 나갔다.
"여기가 어디라고 발을 들이는가."
서진의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다. 크게 울리지 않았으나 마당의 소음을 가르고 명확하게 적들의 귓전에 가닿았다. 그의 시선은 상대의 눈이나 칼끝이 아니라, 어깨뼈와 골반의 중심선에 닿아 있었다. 내력이 없어 기세를 뿜어내지 못할지언정, 눈앞의 상대가 체중을 어디에 싣고 있는지는 훤히 읽혔다.
사당 툇마루 구석에서 거친 기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낡은 청포를 걸친 대사형 배도현이 핏기 없는 얼굴로 기둥을 짚고 일어서고 있었다. 허리춤에 차고 있는 진검은 녹이 슬어 있었고, 그의 눈빛은 짙은 피로와 자조로 가득 차 있었다.
"서진아, 물러서라. 단전도 성치 않은 녀석이 나설 자리가 아니다. 저자들은 목숨을 노리고 온 흑호방 놈들이다."
배도현의 경고는 차가웠지만 그 안에는 체념이 짙게 깔려 있었다. 문파가 무너지고 사부마저 행방이 묘연해진 지금, 배도현에게 남은 것은 무력한 사당을 지키다 스러질 날뿐이었다. 그런 사형의 만류에도 서진의 발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사형, 물러설 곳은 이미 사당 문지방 뒤편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서진은 조용히 목검의 끝을 지면에서 한 뼘 들어 올렸다. 칼끝이 가리키는 방향은 정면에서 비죽거리는 사내의 목덜미였다. 내력이 없다는 사실을 숨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만 뼈를 깎으며 허공을 갈랐던 수만 번의 찌르기와 베기가 온몸의 근육에 선명한 기억으로 새겨져 있을 뿐이었다.
02
오만한 칼날
사내의 얼굴에 노골적인 멸시가 번졌다. 손에 쥔 것이 진검도 아닌 먼지투성이 목검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자 흑호방 무리들 사이에서 비열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도끼눈을 뜬 선두의 사내가 귀두도를 허공에서 가볍게 휘두르며 바람을 갈랐다.
"단전도 깨진 놈이라더니, 제 목숨 귀한 줄도 모르는 천치였군. 야, 사지 병신을 만들어 마당구석에 처박아 둬라!"
사내가 바닥을 박차며 쇄도했다. 거친 도세가 허공을 비스듬히 가르며 서진의 어깨를 향해 내리꽂혔다. 그 움직임에는 한 점의 내력이 실려 있어 칼날 주변으로 서슬 퍼런 풍압이 일어났다. 평범한 삼류 무인이라면 그 칼바람에 위축되어 뒷걸음질을 쳤을 터였다.
하지만 서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적의 발이 땅을 박차는 순간과 무게중심이 오른쪽 무릎으로 쏠리는 찰나를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칼날이 정수리를 향해 반 척 거리까지 좁혀들었을 때, 서진의 상체가 아주 미세하게 왼쪽으로 반 보 비틀렸다.
배도현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피해라!"
콰직!
부딪힌 것은 서진의 살점이 아니었다. 서진의 목검이 날아드는 귀두도의 칼등을 옆에서 비스듬히 훑고 지나가며 날카로운 마찰음을 토해냈다. 정면으로 맞서 힘을 겨루는 것이 아니었다. 칼날의 진행 방향에 살짝 회전력을 얹어 궤적을 빗겨 내는, 백운검파의 가장 기초적인 제1검식 '사선쳐내기'였다.
사내의 도세가 허공으로 헛돌았다. 온 체중을 실었던 칼날이 엉뚱한 허공을 베고 지나가자, 사내의 상체가 앞으로 크게 쏠리며 중심을 잃었다. 그의 목덜미와 겨드랑이 사이가 휑하게 비어 버렸다.
"어, 억……?"
사내의 당황한 음성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진의 발이 흙바닥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뒤틀렸던 골반이 용수철처럼 튕겨 나가며 전신의 무게가 흑단목검의 끝으로 집중되었다. 내력은 없었으나 다리와 허리, 어깨로 이어지는 힘의 전달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매끄러웠다.
서진의 눈빛은 북풍한설처럼 고요했다. 공포나 증오 따위는 깃들지 않은, 오직 검을 뻗어야 할 지점만을 응시하는 냉철한 집중이었다. 마당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툇마루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배도현의 두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뜨였다. 기초 중의 기초라며 거들떠보지도 않던 검식이 저토록 정교한 틈새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03
마당의 반격
목검의 끝이 허공을 찌르는 궤적은 직선 그 자체였다. 망설임 없는 찌르기가 사내의 쇄골 아래 혈도를 향해 벼락처럼 쏘아져 들어갔다. 사내는 뒤늦게 칼을 거두어 막으려 했으나, 이미 앞으로 쏠려버린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허둥거릴 뿐이었다.
탁!
단단한 목검의 끝이 사내의 가슴팍 방패막이를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뼈마디가 울리는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사내의 몸이 뒤로 두어 걸음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내력이 담기지 않은 목검의 타격이었음에도, 체중의 반작용과 정확한 타격점이 맞물리자 사내는 숨을 헐떡이며 흉부를 움켜쥐었다.
"이, 이 새끼가…… 감히 나무 막대기로!"
사내의 얼굴이 분노와 수치심으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내력도 없는 폐인에게 검세를 흘려지고 일격을 허용했다는 사실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뒤에 서 있던 세 명의 패거리들도 서늘해진 얼굴로 칼을 고쳐 쥐며 마당의 거리를 좁혀왔다.
배도현이 툇마루를 박차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의 손에 쥔 녹슨 진검이 서늘하게 떨리고 있었다.
"서진아, 뒤로 물러나라! 이제 놈들이 한꺼번에 덤벼들 것이다!"
그러나 서진은 오히려 반 보 더 앞으로 나아갔다. 흑단목검의 날은 여전히 흔들림 없이 수평을 유지하고 있었다. 상대의 진검과 부딪쳤음에도 목검의 날에는 작은 흠집 하나 생기지 않았다. 오래된 사당의 구석에서 비바람을 견뎌온 검게 그을린 목검은 생각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묵직한 무게감을 지니고 있었다.
"사형, 등을 비우지 마십시오. 저들은 우리 둘을 다 죽이기 전에는 이 문을 나가지 않을 겁니다."
서진의 담담한 어조에 배도현은 턱 끝을 바짝 죄었다. 폐인이 되어 문파에 굴러들어온 사제라고만 여겼다. 단전이 망가진 자는 무협의 세계에서 송장이나 다름없다고 믿어왔던 자신의 오만함이, 저 곧게 뻗은 등판 앞에서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배도현은 침을 꿀꺽 삼키며 서진의 왼쪽 사각지대로 자연스럽게 발을 옮겼다.
우두머리 사내가 핏발 선 눈으로 귀두도를 번쩍 치켜들었다. 이번에는 방심 따위는 없었다. 칼날에 짙은 백색의 진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돌바닥을 부술 듯한 기세로 도신 통째로 내리찍어 서진의 목검과 목덜미를 한꺼번에 두 동강 내겠다는 살기였다.
"죽여 버려라! 뼈까지 으스러뜨려 줘!"
적의 묵직한 도날이 찢어지는 파공음과 함께 연서진의 머리 위로 쇄도하는 바로 그 찰나였다. 연서진은 숨을 깊게 삼키며 단전을 대신해 자신의 척추와 어깨뼈를 단단히 잠갔다. 그리고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짓쳐드는 칼날의 정면 빈틈을 향해 목검을 쏘아 올렸다.
1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