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린단전 없는 검객 목차

무협 · 4화 / 5화 · 약 8분

제4화 뼈를 깎는 밤

단전 없는 검객

01

부러진 뼈마디의 궤적

지하 석실의 무거운 어둠을 뒤로하고 지상으로 올라오자, 사당 툇마루 틈새로 스며드는 싸늘한 산바람이 두 사람의 이마에 맺힌 땀을 식혔다. 연서진은 품속에 갈무리한 선지 조각의 거친 감촉을 손가락 끝으로 더듬었다. 핏빛으로 번져 있던 흑호방의 호랑이 인장은 단순한 침탈의 흔적이 아니었다. 문파의 뿌리를 통째로 파내어 사부의 숨통을 끊고, 마지막 남은 흔적마저 지워버리려는 치밀한 악의의 증거였다.

배도현이 툇마루 기둥에 등을 기대며 사당 앞마당 너머의 산등성이를 쏘아보았다. 녹슨 진검을 쥔 그의 손등 위로 푸른 힘줄이 돋아나 있었다.

"조장 놈이 손목이 바스러진 채 돌아갔으니, 흑호방 본대에서는 사당에 아직 반항할 힘이 남아 있다고 여길 게다. 밀실의 청동 궤가 열렸다는 사실을 놈들이 눈치챈다면 더는 시간을 끌지 않을 테지. 놈들은 사당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목인 북쪽 협곡 바위 능선을 타고 내려올 것이다. 사방이 가파른 절벽이라 말이나 수레는 들지 못하니, 은밀히 침투하기에 그만한 길목이 없지."

"그렇다면 놈들이 능선을 넘어오기 전까지, 석판의 이치를 몸에 온전히 새겨 넣어야 합니다."

서진은 지체하지 않고 앞마당 흙바닥으로 내려섰다. 그는 손에 쥔 흑단목검의 손잡이를 고쳐 잡으며 석판에 음각되어 있던 골격의 도해들을 머릿속에 펼쳐냈다. 내력이 없다는 것은 곧 기운의 폭발력으로 허점을 메울 수 없다는 뜻이었다. 오직 발뒤꿈치에서 시작해 무릎과 골반, 척추 마디를 타고 어깨로 이어지는 골격의 연동만이 그가 쥔 유일한 칼날이었다.

서진이 오른발을 내딛으며 백운검파의 제1검식 사선쳐내기를 펼쳐냈다. 그러나 아래로 가라앉아야 할 체중이 허리춤에서 덜컥 걸렸다. 단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척추뼈를 억지로 비틀어 잠그려 하자, 갈비뼈 안쪽에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치밀어 오르며 목검의 궤적이 반 치 가량 허공으로 빗나갔다.

"크윽……."

서진이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을 뻔하자, 툇마루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배도현이 다급히 마당으로 뛰어 내려왔다. 배도현은 서진의 허리 뒤쪽을 손바닥으로 단단히 받쳐 올렸다.

"무리하게 뼈를 맞물리려 하지 마라. 초대 문주님의 구결은 힘을 가두는 게 아니라, 뼈의 마디마디가 흐르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라 했다. 제1검식에서 제2검식 침수세로 넘어갈 때, 골반의 무게를 먼저 떨어뜨려라. 무릎이 버티지 못하면 허리뼈가 무게를 고스란히 뒤집어쓰게 된다."

배도현의 묵직한 지적은 단순한 훈수가 아니었다. 수년간 문파의 검식을 갈고닦으며 몸으로 겪어온 정통 검사의 혜안이었다. 서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전이 비어 있기에 그는 누구보다도 뼈와 힘줄의 비명에 민감했다. 서진은 다시금 자세를 잡고 목검을 겨누었다.

이번에는 억지로 힘을 주어 뼈를 굳히지 않았다. 발목을 스치며 돌아가는 지면의 반작용을 골반의 회전으로 넘기고, 척추 마디를 유연하게 굽이치게 하여 목검의 칼날 끝으로 힘을 뿜어냈다. 목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이전보다 한층 묵직하고 날카롭게 마당의 정적을 갈랐다.

02

손바닥에 감긴 삼베 붕대

태양이 서쪽 봉우리 너머로 저물고 짙푸른 어둠이 사당 마당을 집어삼킬 때까지 목검이 허공을 가르는 파공음은 멈추지 않았다. 연서진의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마른 흙먼지가 피부에 엉겨 붙어 있었다. 제1식 사선쳐내기부터 제12식 운무세에 이르기까지, 석판의 골격 축을 백운검파의 기본 검식 열두 가지와 결합하는 과정은 뼈를 깎아내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내력이 없었기에 지면의 충격을 오롯이 육신의 관절과 근육으로 감내해야 했다. 목검을 쥔 서진의 오른손 손바닥은 이미 살갗이 벗겨져 붉은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거친 나무 손잡이를 타고 흘러내린 핏방울이 마당 흙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열두 번째 검식을 마치고 회검하는 순간, 서진의 손가락이 마비된 듯 경련을 일으키며 목검이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뻔했다. 서진이 이를 악물며 검을 다시 쥐려 하자, 어둠 속에서 성큼 다가온 억센 손길이 그의 손목을 부드럽게 낚아챘다.

"멈춰라. 지금 더 휘둘렀다가는 손의 인대가 끊어진다."

배도현이었다. 배도현은 서진의 손에서 흑단목검을 조심스럽게 받아 제단 아래 내려놓았다. 그리고 품속에서 거친 삼베 천과 백색 가루약이 든 작은 사기병을 꺼냈다. 문파가 번성하던 시절 제자들이 타박상을 입었을 때 바르던 지혈제였다.

배도현은 말없이 서진을 툇마루 끝에 앉히고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거칠고 투박한 손길로 서진의 찢어진 손바닥 위에 약가루를 털어 넣자, 알싸한 화기가 번지며 살점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이 일었다. 그러나 서진은 신음 한마디 내뱉지 않았다.

"사형, 아직 검로의 연결이 매끄럽지 못합니다. 여덟 번째 식에서 열 번째 식으로 넘어가는 전환이 반 박자 늦습니다."

"천치 같은 놈. 네 손이 이 꼴이 되었는데 검로 타령이냐."

배도현이 혀를 차며 삼베 붕대를 서진의 손바닥과 손목 둘레로 단단히 감아올렸다. 거친 삼베 천 사이로 배어든 피가 붉은 점을 찍었지만, 붕대를 조이는 배도현의 손끝에는 깊은 정성과 미안함이 서려 있었다.

배도현은 매듭을 묶은 뒤 서진의 어깨를 툭 쳤다. 녹슨 진검만을 쥐고 사당 구석에서 썩어가던 자신의 지난날을 되돌아보는 듯, 배도현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사부님이 떠나시고 문파가 흩어졌을 때, 나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단전이 깨진 네가 산문에 들어왔을 때도, 그저 갈 곳 없는 또 하나의 짐짝이 늘어난 줄로만 알았지. 하지만 틀린 것은 나였다. 부러진 것은 문파의 간판이었지, 검을 쥐는 자의 마음이 아니었어."

서진은 붕대가 칭칭 감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삼베 천의 묵직한 압박감이 욱신거리던 손목 관절을 단단하게 지탱해주고 있었다. 붕대를 감아준 것은 단순한 천 조각이 아니라, 문파의 몰락 속에서 홀로 버텨온 대사형의 묵직한 신뢰이자 피를 나눈 전우로서의 맹세였다.

"사형이 제 곁에서 등을 지켜주지 않았다면, 저는 마당에서 이미 적의 칼날에 쓰러졌을 겁니다. 백운검파는 아직 망하지 않았습니다."

배도현의 메마른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에는 더는 과거의 자조나 회의가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다가올 사투를 향해 벼려진 서슬 퍼런 무인의 결기가 서려 있었다.

03

산등성이를 가르는 불화살

밤이 깊어지며 산속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서진은 붕대로 동여맨 손으로 흑단목검의 자루를 다시 쥐었다. 손바닥의 통증은 삼베의 단단한 지지력 덕분에 오히려 검자루와의 밀착감을 높여주었다. 서진은 호흡을 깊게 들이쉬며 마당 한가운데에 섰다.

배도현 또한 허리춤에서 녹슨 진검을 뽑아 들었다. 칼날에 이는 쇳소리가 차가운 밤공기를 갈랐다.

"합을 맞춰보자. 흑호방 놈들은 일대일로 덤벼들지 않는다. 적들이 떼를 지어 몰려올 때 네 골격의 보법이 진검의 기세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지 확인해야 해."

"부탁드립니다, 사형."

서진이 검끝을 가라앉히자 배도현이 바닥을 차며 쇄도했다. 녹슨 진검이었지만 배도현의 몸에 흐르는 십수 년의 내력이 칼날을 감싸며 묵직한 바람을 일으켰다. 진검이 서진의 오른쪽 쇄골을 향해 비스듬히 떨어져 내렸다.

서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낮 동안 수천 번을 반복했던 석판의 보법이 생각보다 먼저 몸을 움직였다. 서진의 왼발이 흙을 긁으며 반 보 뒤로 빠졌고, 그 반동으로 골반의 축이 뒤틀리며 척추를 타고 올라온 회전력이 흑단목검으로 뿜어졌다.

탁!

목검의 옆날이 진검의 칼등을 정확한 각도로 걷어냈다. 정면 충돌이 아니었다. 배도현의 칼날이 지닌 무게중심을 살짝 비틀어 허공으로 빗겨 보낸 서진은, 그 흐름을 멈추지 않고 제3식 운검세로 이어가며 목검의 끝을 배도현의 옆구리 틈새로 부드럽게 찔러 넣었다.

배도현의 칼날이 허공을 베고 지나간 순간, 서진의 목검 끝은 이미 배도현의 옆구리 옷자락 바로 앞에서 우뚝 멈춰 서 있었다. 배도현의 눈에 경탄의 빛이 어렸다.

"완벽하다. 내력의 압박을 전혀 거스르지 않고 오히려 내 검세를 지렛대 삼아 파고들었어. 이것이라면…… 흑호방 정예들의 검계 속에서도 길을 열 수 있다."

배도현의 감탄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쉬이이익!

적막한 산문 너머의 어둠을 찢고 섬뜩한 파공음이 밤하늘을 갈랐다. 서진과 배도현의 고개가 동시에 북쪽 능선을 향해 돌아갔다. 검은 장막 같던 산등성이 위에서 붉은 불길을 머금은 불화살 수십 개가 포물선을 그리며 사당을 향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불화살이다!"

배도현이 소리치며 진검을 쳐들었다. 흑호방의 척후들이 밀실의 비밀을 확인하기도 전에, 산문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어 안에 있는 자들을 밖으로 몰아내려는 잔혹한 수작이었다. 까만 밤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짓쳐드는 화염의 궤적이 두 무인의 눈동자에 서늘하게 비쳐들었다.

4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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