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린이면의 규칙 수호자 목차

판타지 · 2화 / 5화 · 약 7분

2화. 첫 번째 생존 원칙

이면의 규칙 수호자

01

1장. 잿빛의 경계선

아서가 지팡이 머리를 들어 올리자마자 바닥에 처박혔던 괴물의 잔해가 치익거리는 소리와 함께 검붉은 연기로 흩어졌다. 점액질처럼 끈적거리던 형체는 메마른 잿가루로 변해 허공 중으로 날아갔다.

이현은 여전히 문틀을 꽉 쥔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팡이 끝에서 튀던 은빛 잔류 전류가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희미한 비릿함을 풍기며 가라앉았다.

"초대장을 쥔 사람이면 기본적인 상황 판단은 할 줄 알았는데, 제 과대평가였습니까?"

아서는 손목을 가볍게 틀어 지팡이를 몸 안쪽으로 회수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감청색 코트 깃 사이로 은빛 태엽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진 깃 브로치가 드러났다.

"당신이 누구인지 묻는 게 먼저겠지만, 그 괴물이 뭔지부터 알아야겠습니다."

이현은 뒤꿈치를 천천히 떼어내며 바닥의 회색 결정을 내려다보았다. 흩어진 재는 현실의 흙이나 아스팔트에 닿지 않고 오직 문 안쪽의 회색 바닥 위에서만 맴돌았다.

"그림자 유충입니다. 현실의 법칙이 얇아진 경계선 틈바구니를 파고들어 인간의 체온과 이성을 갉아먹는 존재죠."

아서는 지팡이 끝으로 문틀 바로 앞의 경계면을 툭툭 건드렸다. 그가 건드릴 때마다 투명한 막이 수면처럼 흔들리며 미세한 진동을 일으켰다.

"그 초대장은 단순한 통행증이 아닙니다. 이면 영역에 당신이라는 존재의 좌표를 고정해 주는 닻이자, 이 영역의 왜곡을 견뎌내야 하는 일종의 계약서입니다."

"계약서라고요? 난 그저 문을 열 수 있는 규칙을 따랐을 뿐입니다."

"그 규칙을 자력으로 읽고 실행했다는 것 자체가 결사의 시험에 응한 셈이죠. 초대장의 소지자는 두 가지 의무를 집니다. 첫째, 왜곡을 관측하고 기록할 것. 둘째, 현실로 새어 나가는 침식을 차단할 것."

아서의 목소리는 사무적이었으나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그는 지팡이를 양손으로 가볍게 쥐며 이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당신이 방금 저 문을 열면서 경계의 균열이 벌어졌습니다. 유충 한 마리를 잡았다고 끝난 게 아닙니다. 이 통로가 완전히 안정화되기 전까지 당신은 이 경계선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현의 물음에 아서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려 폐허의 안쪽을 가리켰다.

"이면 영역의 첫 번째 생존 원칙을 몸으로 익히는 겁니다. 결코 멈추지 말고, 어긋난 선의 중심을 찾아 안전지대로 건너가십시오."

02

2장. 침식의 궤적을 읽는 눈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닥의 회색 결정들이 와르르 흔들렸다. 문 너머의 폐허 전체에서 기괴한 불협화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자줏빛 안개가 소용돌이치며 바닥의 자갈들을 허공으로 띄워 올렸다. 현실의 골목길과 맞닿아 있던 은색 문틀마저 삐걱거리며 틈새로 보랏빛 균열이 번져갔다.

"침식 파동이 시작됐군요. 저 안개가 닿는 곳은 공간의 좌표 자체가 부서집니다."

아서는 지팡이를 짚은 채 침착하게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그가 서 있는 자리는 여전히 안전해 보이지 않았다. 바닥 전체가 불규칙하게 뒤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현은 허둥대는 대신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어지럽게 요동치는 자갈들 사이로 일정한 흐름이 보였다.

'불규칙해 보이지만 방향성이 있어. 첫 번째 벽돌에서 봤던 그 각도다.'

이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자갈들이 튀어 오르는 높이와 안개가 흘러가는 속도를 비교했다. 왼쪽 구역의 결정들은 1초에 세 번씩 강하게 진동하며 검게 변색되고 있었지만, 오른쪽으로 30도 비스듬히 이어진 결정들은 옅은 푸른빛을 유지하며 일정하게 맥동하고 있었다.

"아서 씨, 가만히 서 있지 말고 오른쪽으로 세 걸음 물러나세요."

이현의 차분한 목소리에 아서의 눈썹이 꿈틀했다.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오른쪽은 이미 지반이 갈라지고 있습니다."

"갈라지는 게 아니라 바닥의 결이 뒤틀리며 에너지를 밖으로 밀어내는 겁니다. 거길 밟지 않으면 5초 뒤에 당신 발밑이 통째로 꺼집니다."

이현은 망설이지 않고 직접 몸을 움직였다. 그는 초대장을 가슴팍 안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보폭을 좁혀 푸른빛이 맥동하는 결정의 능선 위로 오른발을 디뎠다.

쿵!

그가 발을 얹자마자 그를 둘러싼 자줏빛 안개가 유리벽에 부딪힌 것처럼 양옆으로 튕겨 나갔다. 그가 디딘 결정 아래로 쐐기형 문양이 희미하게 떠오르며 바닥의 진동을 흡수해 버렸다.

아서는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이현의 발밑과 조금 전 자신이 서 있던 자리를 번갈아 보았다. 찰나의 순간, 아서가 서 있던 곳의 바닥이 흑색 화염과 함께 푹 꺼지며 바닥 모를 허공으로 꺼져버렸다.

아서는 재빨리 지팡이로 바닥을 차며 이현이 서 있는 결정선 위로 몸을 날렸다. 코트 자락이 허공을 가르며 날카로운 파열음을 냈다.

"……단순한 민간인의 시선이 아니군요. 이면의 왜곡 궤적을 맨눈으로 식별하다니."

아서는 거친 숨을 고르며 지팡이를 바로잡았다. 그의 서늘하던 눈매에 전과는 다른 깊은 흥미와 경계가 동시에 서려 있었다.

"도심의 보도블록이나 난간 균열을 보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규칙만 찾으면 어디가 단단한지 보이니까요."

이현은 덤덤하게 대답하며 안쪽으로 뻗은 안전한 궤적을 향해 다시 시선을 던졌다. 눈앞에 작은 석조 제단 형태의 안전지대가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03

3장. 굳어진 칼날

두 사람은 이현이 짚어낸 궤적을 따라 신중하게 발을 옮겼다. 한 발짝을 뗄 때마다 주변의 보랏빛 안개가 사납게 일렁였지만, 푸른 결정의 중심축을 밟고 지나가는 동안에는 침식의 파도가 결코 그들을 덮치지 못했다.

마침내 폐허 초입의 난기류를 뚫고 원형 석조 제단 위에 도달하자, 사방을 짓누르던 기괴한 압박감이 일순간 씻은 듯이 사라졌다.

제단 둘레에는 현실의 골목길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기하학적 문양이 원형으로 둘러쳐져 은은한 방어막을 형성하고 있었다.

"휴, 여긴 완전히 안정되어 있군요."

이현은 제단 바닥에 손을 짚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차가운 돌의 질감이 현실과 다를 바 없이 온전하게 손바닥에 닿았다.

"방어 결계의 중심핵입니다. 이 안에서는 이면의 침식이 작용하지 않죠."

아서는 지팡이를 제단 바닥에 세워 짚으며 이현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숨길 수 없는 감탄이 묻어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초대장을 손에 넣고 문을 연 자들 중 열에 아홉은 첫 번째 침식 파동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당신의 그 관찰력은 단순한 우연이나 재능의 수준을 넘어섰군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이제 이 초대장의 진짜 발신인이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습니까?"

이현이 가슴 포켓에서 편지 봉투를 꺼내 들며 묻자, 아서는 턱을 매만지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질문의 답은 결사의 본부 거점에 도착해야만 명확해집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것만은 확실하죠. 당신은 초대받을 자격이 충분했습니다."

아서가 조금은 누그러진 어조로 손을 내밀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제단 한구석을 유심히 살피던 이현의 시선이 바닥의 갈라진 틈새에 멈추어 섰다.

"아서 씨, 결사의 요원들은 다들 이런 무기를 씁니까?"

이현이 가리킨 곳에는 묵직한 강철 단도 한 자루가 제단의 석판을 꿰뚫은 채 깊숙이 박혀 있었다.

단도의 손잡이 끝에는 아서의 코트 깃에 달린 브로치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은빛 태엽 문양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러나 칼날은 평범하지 않았다. 칠흑 같은 점액질 괴물의 피가 말라붙어 있었고, 쇳물이라도 닿은 것처럼 검푸른 부식흔이 손잡이까지 흉포하게 기어오르고 있었다.

아서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졌다. 그는 다급한 걸음으로 다가가 단도의 칼자루를 내려다보았다.

"이건…… 결사 내부의 정예 요원에게만 지급되는 은빛 태엽의 단도입니다."

"그게 왜 이런 위험한 괴물의 둥지 초입에 버려져 있는 겁니까?"

아서는 지팡이를 쥔 손에 서서히 힘을 주었다. 단도 주변의 돌바닥에는 누군가 일부러 방어 결계를 훼손하려 긁어낸 듯한 기괴한 균열이 흉터처럼 남아 있었다.

아서의 서늘한 눈동자가 폐허의 더 깊은 암흑을 향했다. 침묵 속에서 차가운 긴장감이 두 사람 사이를 무겁게 짓눌렀다.

2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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