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1장. 일그러진 궤적
카일이 오염된 장검을 비스듬히 눕히자, 칼날을 타고 흐르던 검붉은 마력이 배전실 바닥의 균열선으로 맹렬하게 쏟아져 내렸다. 지직거리는 파열음과 함께 바닥 타일의 이음매가 울컥 솟구쳐 올랐다. 현실의 원근법이 완전히 붕괴된 방 안에서, 벽면에 설치된 고압 배전반들이 기괴한 각도로 꺾이며 이현과 아서의 시야를 짓눌렀다.
"죽어라!"
카일의 형체가 공기 속으로 녹아들 듯 흐려지더니, 찰나의 순간에 세 갈래의 검은 잔상으로 갈라져 쇄도했다. 단순한 고속 이동이 아니었다. 공간의 접힌 면을 디딤돌 삼아 거리를 강제로 단축하는 왜곡 도약이었다. 그의 칼끝이 공기를 가를 때마다 날카로운 금속성 비명과 함께 보랏빛 파동이 부채꼴로 퍼져 나갔다.
"물러서십시오!"
아서가 지팡이를 앞으로 내지르며 은빛 전류의 방벽을 전개했다. 콰앙! 장검과 은빛 결계가 충돌하는 순간, 고막을 찢는 듯한 충격파가 배전실을 뒤흔들었다. 아서의 코트 자락이 거칠게 펄럭였고, 지팡이를 받친 그의 두 발이 바닥을 긁으며 반 걸음 뒤로 밀려났다. 카일의 검에 깃든 침식 마력은 평범한 결사의 방호벽을 순식간에 부식시킬 만큼 짙고 끈적했다.
카일은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검을 거두지 않고 오히려 회전력을 실어 연속 참격을 날렸다. 그의 발이 바닥을 딛는 위치는 제멋대로 뒤틀려 있었다. 왼쪽 벽면을 차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 칼날은 오른쪽 천장에서 쏟아졌고, 정면에서 뻗어 나온 그림자가 뒤꿈치를 베어 넘기려 들었다. 눈으로 보는 시각 정보와 실제 물리적 위치가 전혀 일치하지 않는 변칙 공간 공격이었다.
이현은 뒤로 물러서지 않고 허리춤의 렌즈를 통해 배전실 전체의 바닥과 벽면을 훑었다. 그의 시선은 허공을 날아다니는 카일의 검날이 아니라, 그가 발을 디딜 때마다 바닥에 번지는 보랏빛 파문의 간격에 고정되어 있었다. 불규칙해 보이는 왜곡에도 반드시 근원적인 흐름과 박동 주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이현은 알고 있었다.
바닥의 파문은 3초마다 0.2초씩 정지했다가, 다시 1.5배의 속도로 팽창하고 있었다. 배전실 중앙에 깨진 채 흩어져 있는 푸른색 억제석 파편들이 그 파동을 흡수하지 못하고 튕겨내면서 일정한 굴절각을 만들어내고 있던 것이었다.
"아서 씨, 오른쪽 셋째 배관을 지팡이로 타격하세요! 당장!"
이현의 다급하고 명료한 외침이 굉음 속을 뚫고 아서의 귓전을 때렸다. 보통의 상황이라면 쇄도하는 적의 칼날을 눈앞에 두고 엉뚱한 배관을 칠 여유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서는 단 한 찰나의 의문조차 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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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어긋난 쐐기
아서는 망설임 없이 몸을 비틀며 지팡이 끝의 은빛 뇌광을 허공이 아닌 오른쪽 벽면의 녹슨 세 번째 고압 배관으로 내리꽂았다. 쾅! 육중한 흑단 지팡이가 배관의 이음매를 강타하는 순간, 억눌려 있던 흑색 고압 증기가 날카로운 굉음과 함께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이현은 바닥에 뒹굴던 억제석 파편 하나를 발끝으로 정확히 걷어찼다. 파편은 허공을 가르며 분출된 증기의 한가운데로 날아가 박혔다. 푸른 억제석의 마력과 고압 증기의 물리적 압력이 충돌하자, 배전실을 지배하던 불규칙한 왜곡 주기가 단숨에 흐트러졌다.
"크윽?!"
공간의 접힌 틈을 타고 아서의 목덜미를 베어 넘기려던 카일의 몸이 허공에서 기괴하게 튕겨 나왔다. 발을 디뎌야 할 좌표의 위상이 급격히 뒤틀리며, 그의 오염된 장검이 허공을 헛돌고 만 것이다. 공간의 규칙을 제멋대로 비틀어 쓰던 자에게 닥친 치명적인 궤도 이탈이었다.
카일의 중심이 무너지며 오른쪽 어깨가 완전히 비어버린 바로 그 찰나였다. 이현은 렌즈를 내리며 아서를 향해 외쳤다.
"지금입니다! 4시 방향, 바닥의 음각선 중심!"
아서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이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의 감청색 코트가 허공을 가르며 번개 같은 속도로 짓쳐 들어갔다. 지팡이 끝에 응축된 은빛 전류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순도 높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현이 짚어낸 4시 방향의 음각선은 배전실 내부에서 왜곡의 반동이 가장 거세게 몰아치는 역류 지점이었다.
콰르릉!
아서의 지팡이가 카일의 오염된 장검 손잡이를 정확히 후려쳤다. 귓전을 찢는 파열음과 함께 장검의 검붉은 마력이 산산조각 나며 흩어졌다. 손목이 꺾인 카일의 손에서 검이 튕겨 나가 벽면에 깊숙이 처박혔다.
"말도 안 돼…… 일개 외부인이 공간 왜곡의 주기를 계산해 냈다고?!"
경악에 질린 카일이 물러서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그의 명치로 아서의 지팡이 끝이 번개처럼 파고들었다. 쿵!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뿜어져 나온 은빛 뇌광이 카일의 전신을 뒤덮었다. 결사 정예 요원의 회색 방호 코트가 타오르며, 카일의 거구는 배전실 벽면으로 거칠게 처박힌 뒤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배전실을 가득 채우고 있던 보랏빛 안개와 기괴한 진동이 일순간 잦아들었다. 거칠게 타오르던 비상등의 붉은 불빛만이 쓰러진 배신자의 창백한 얼굴을 차갑게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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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바닥에 떨어진 지도
배전실 바닥에 쓰러진 카일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피를 토해냈다. 그의 피부 위로 돋아나 있던 보랏빛 핏줄들이 마력의 고갈과 함께 서서히 잿빛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아서는 지팡이를 바닥에 짚은 채,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동료였던 자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아서의 감청색 코트 소매는 카일의 검기에서 뿜어져 나온 파편으로 인해 찢겨 있었고, 손등에는 은빛 전류의 과부하로 인한 붉은 화상 자국이 선명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자신의 부상이 아니라 곁에 선 이현에게 머물렀다.
"……놀라웠습니다, 강이현 씨. 배관을 쳐서 공간의 굴절각을 강제로 틀어버릴 줄은 생각조차 못 했습니다. 만약 당신의 계산이 단 0.1초라도 어긋났다면, 내 지팡이가 아니라 내 목이 먼저 날아갔을 겁니다."
아서의 목소리에는 깊은 안도와 함께 경의에 가까운 감정이 실려 있었다. 처음 골목길에서 마주했을 때의 경계심이나, 폐허 초입에서 던지던 시험하듯 날카로운 시선은 이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목숨을 온전히 맡기지 않고서는 결코 행할 수 없었던 호흡이었다.
이현은 렌즈를 조심스레 닦아 허리춤에 갈무리하며 엷은 숨을 내쉬었다.
"아서 씨가 제 지시를 망설이지 않고 따라 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규칙을 읽어내도, 그걸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는 실력자가 없었다면 아무 소용도 없었을 테니까요."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말로 다 표현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굳건한 신뢰가 침묵 속에 자리 잡았다. 결사의 규율이나 상부의 명령 따위가 아닌, 사선을 함께 넘나든 동료로서의 완전한 인정이었다.
그때, 축 늘어진 카일의 품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기름종이로 단단히 밀봉된 묵직한 서류 한 뭉치가 바닥으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이현이 다가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봉인을 뜯어내자 정교하게 인쇄된 거대한 양피지 도면이 펼쳐졌다. 그곳에는 폐역사를 넘어 서울 도심 한복판의 지하 수로망 전체가 붉은 선으로 촘촘히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도심 최대의 번화가이자 지하철 환승역이 밀집한 중심가 지하 광장 위치에, 검은 먹물로 불길한 원형 문양이 굵게 찍혀 있었다.
'침식 촉진 장치 매설 지점.'
도면 하단에 적힌 서늘한 주석을 읽어 내린 아서의 눈빛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이건…… 단순한 역사 붕괴가 목적이 아니었군요. 도시 중심부 전체를 이면 영역으로 가라앉히려는 장치가 이미 지하 수로망 심장부에 가동 준비를 마친 상태입니다."
5화 끝 · 여기까지가 폴린이 써 둔 이야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