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린이면의 규칙 수호자 목차

판타지 · 4화 / 5화 · 약 7분

4화. 선로 위의 유언

이면의 규칙 수호자

01

1장. 핏빛 기록과 파괴된 억제석

선로 사이에 끼워진 수첩은 검붉은 핏자국으로 얼룩져 모서리가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이현은 조심스레 몸을 숙여 석화된 대원의 손끝을 건드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수첩을 빼냈다. 표지에는 결사의 표식인 은빛 태엽 문양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으나, 그 위로 거무스름한 결정 가루가 엉겨 붙어 있었다.

아서는 지팡이를 짚은 채 침통한 눈으로 대원의 굳어버린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허공을 향해 손을 뻗은 자세 그대로 멈춘 대원의 눈동자는 이미 유리구슬처럼 탁하게 변해 있었다. 그가 밟고 선 철로 바닥에서는 미약한 파동이 주기적으로 치밀어 오르며 주변 공기를 바늘처럼 찌르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지키려 했던 기록입니다. 무엇이 적혀 있습니까, 이현 씨?"

아서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현은 장갑을 낀 손가락으로 피에 젖어 굳은 종이장을 조심스럽게 한 장씩 넘겼다. 거친 필체로 휘갈겨 쓴 글씨들이 나타났다. 정밀하게 측정된 수치와 좌표, 그리고 다급박한 경고가 줄을 잇고 있었다.

'17일 03시, 제3구역 침식 억제석 점검 완료. 이상 무. 그러나 본부에서 급파된 정예 요원 1인이 봉인 구역 출입 권한 없이 접근함.'

'17일 04시 15분, 억제석의 마력 순환로가 물리적으로 절단됨. 외력에 의한 파괴. 결사 내부의 정예 지급 장비인 은빛 태엽 단도의 참격 흔적 확인. 억제석 파괴 직후 심장부의 왜곡 핵이 폭주하기 시작함. 그자가 억제석을 깨뜨린 뒤 안쪽으로 도주했다.'

이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앞서 안전 제단 바닥에 박혀 있던 그 오염된 단도를 떠올렸다. 괴물의 피에 젖어 있던 그 무기는 우연히 버려진 것이 아니었다. 침식을 억누르던 핵심 장치를 고의로 베어 부순 배신의 흔적이었던 것이다.

"아서 씨, 이걸 보세요. 이 대원이 공간에 휩쓸려 굳어버린 건 부주의 때문이 아닙니다. 누군가 고의로 침식 억제석을 파괴했고, 폭주하는 핵의 파동을 몸으로 막아서려다 휘말린 겁니다."

이현이 수첩의 마지막 페이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억제석이 부서지며 뿜어낸 잔류 마력의 파장 패턴과 파괴자의 도주 방향이 피 묻은 지문과 함께 거칠게 그려져 있었다.

"초입 제단에 박혀 있던 그 정예 요원의 단도…… 괴물과 싸우다 떨어뜨린 게 아니었습니다. 침식 억제석을 부수고 결계를 강제로 과부하시키는 도구로 쓰인 뒤, 오염을 흡수해 부식된 채 방치된 거였군요."

아서의 턱관절이 굳게 맞물렸다. 지팡이 끝에서 은빛 전류가 파직거리며 차가운 불꽃을 튀겼다. 그의 서늘한 눈동자에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깊은 배신감이 동시에 일렁였다.

02

2장. 균열의 결사, 흔들리는 믿음

아서는 선로 바닥에 굳어버린 동료의 어깨를 조용히 짚었다. 그의 긴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차갑게 식어버린 석조의 감촉만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져 왔다.

"결사 내부의 정예 요원이 억제석을 파괴했다…… 그것도 최상위 지휘관의 직속 명령을 받는 자가 말입니다."

아서가 읊조리듯 내뱉은 말에 이현은 고개를 돌렸다. 차분하고 냉철하기만 하던 남자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균열이 드러나 있었다. 이현은 수첩을 덮어 품에 넣으며 아서의 옆으로 다가섰다.

"아서 씨, 뭔가 짐작 가는 자가 있는 겁니까?"

아서는 지팡이를 거두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 한숨 속에는 오랜 시간 쌓여 온 조직에 대한 의구심과 피로가 짙게 배어 있었다. 그는 승강장 천장에 매달린 채 삐걱거리는 녹슨 전광판을 올려다보았다.

"결사는 이면 영역의 침식을 통제하고 현실과의 경계를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설립되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수개월간, 상층부의 움직임은 석연치 않았습니다. 위험도가 낮은 구역의 봉인은 방치하면서, 유독 도시 중심부와 직결된 고위험 균열에만 정예 전력을 집중 배치했죠. 감시관님이 독단으로 이현 씨에게 초대장을 보낸 것도…… 상층부 지휘관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아서는 감청색 코트 안쪽을 쓸어내리며 이현을 똑바로 응시했다. 처음 만났을 때의 경계심이나 시험하듯 떠보던 태도는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곳에는 오직 같은 위기를 마주한 자만이 나눌 수 있는 절박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지휘관은 오래전부터 이면 영역의 핵이 지닌 고유 진동수를 인위적으로 조작하려 했습니다. 왜곡의 힘을 현실의 질서를 재편하는 동력으로 삼을 수 있다고 믿는 극단주의자들에게 포섭된 게 틀림없습니다. 저는…… 그들의 명령을 충직하게 따르며 현장을 통제하는 사냥개 노릇을 해왔던 셈이고요."

자조 섞인 아서의 고백에 이현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명령을 따랐다고 해서 배신자의 공범이 되는 건 아닙니다. 당신은 그저 사람들을 지키려 했을 뿐이잖아요. 지금 중요한 건, 그자가 억제석을 부수고 도주하면서 남긴 왜곡의 궤적을 쫓는 일입니다."

이현은 허리춤의 렌즈를 꺼내 눈가에 대고 바닥을 비추었다. 억제석이 부서진 자리에서 뿜어져 나온 보랏빛 마력의 잔류선이, 마치 뱀의 기어간 자국처럼 승강장 남쪽 깊숙한 터널 배전실 방향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 잔류선은 주변 공간의 공기를 불규칙하게 진동시키며 웅웅거리는 저주파음을 내뿜고 있었다.

"이면 영역의 핵이 불안정한 고유 진동수로 맥동하고 있습니다. 이 진동 주기를 방치하면 승강장 전체가 붕괴할 겁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아서 씨."

"……고맙습니다, 강이현 씨. 길을 열어 주십시오. 이번에는 결사의 규율이 아니라, 내 자신의 신념을 걸고 그 뒤를 따르겠습니다."

아서의 눈빛이 다시금 서늘하고 단단한 빛을 되찾았다. 두 사람은 흩어진 잔류 마력의 궤적을 밟으며 배전실을 향해 속도를 높였다.

03

3장. 어둠 속의 칼날

배전실로 이어지는 좁은 관리 통로는 짙은 보랏빛 안개와 타버린 전선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벽면에 설치된 철제 배관들은 높은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배불뚝이처럼 부풀어 올라 있었고, 이음매 사이로 흑색 증기가 쉭쉭 소리를 내며 뿜어져 나왔다.

이현은 렌즈 너머로 보이는 공간의 뒤틀림을 읽으며 신중하게 보폭을 조절했다. 바닥의 타일들은 30센티미터 간격으로 위상이 엇갈려 있어, 자칫 선을 잘못 밟았다간 선로 위의 대원처럼 신체 일부가 벽면에 박혀버릴 위험이 있었다.

"앞으로 세 걸음 직진 후, 오른쪽 벽면의 철제 프레임에 체중을 실으세요. 바닥 중앙은 왜곡 파동의 사각지대가 아니라 함정입니다."

이현의 낮고 빠른 지시에 아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날려 벽면 프레임을 딛고 착지했다. 그가 지나간 자리의 바닥 타일이 순식간에 보랏빛 안개 속으로 가라앉으며 날카로운 파열음을 냈다. 완벽한 호흡이었다.

통로 끝의 두꺼운 방화문은 이미 마력의 충격파로 인해 거칠게 찢겨 있었다. 찢어진 문틈 너머, 붉은 비상등이 깜빡이는 배전실 중앙에 한 인영이 우뚝 서 있었다.

그는 결사 특유의 짙은 회색 방호 코트를 입고 있었지만, 코트의 옷깃과 소매는 이미 보랏빛 침식 결정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의 오른손에는 검은 점액질이 뚝뚝 떨어지는 장검이 들려 있었고, 발밑에는 조각난 푸른색 억제석 파편들이 무참하게 짓밟혀 있었다.

"기어코 여기까지 냄새를 맡고 따라왔군, 아서. 감시관의 개 노릇은 아직도 질리지 않았나?"

인영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 위로 보랏빛 핏줄이 기괴하게 돋아나 있는 사내, 결사 정예 요원 카일이었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이면 영역의 왜곡에 깊이 물들어 붉은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아서가 지팡이를 비스듬히 겨누며 한 걸음 나아섰다. 지팡이 끝의 은빛 룬 문양이 사납게 박동했다.

"카일…… 역시 네놈이었나. 초입 제단에 버려진 단도와 억제석을 파괴한 흔적 모두 네 마력 파장과 일치했다. 결사를 배신하고 균열을 폭주시킨 이유가 뭐냐!"

카일은 비틀린 조소를 흘리며 오염된 칼날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칼끝이 가리킨 곳은 아서와 이현의 심장이었다. 칼날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붉은 마력이 배전실 바닥의 왜곡 선들을 자극하며 맹렬한 기세로 공간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배신? 이건 진화다. 미련하게 낡은 세계의 껍질을 지키려 드는 감시관과 너희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 핵의 고동 소리가 들리지 않나? 이 도시 전체가 새로운 질서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카일의 서늘한 살기가 좁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오염된 칼날이 공기를 가르며 날카로운 비명을 토해냈다.

"여기서 더 나아갈 생각은 버려라. 침묵 속에서 이 공간의 거름이 되어라!"

4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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