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제1장: 닫힌 숨통
쉭, 쉬익…….
찌그러진 공조 덕트 말단에서 새어 나오던 희박한 공기마저 마나 균열의 뒤틀림에 짓눌려 뚝 끊겼다. 배전실 문 너머에서 들려오던 아이의 거친 숨소리는 이제 헐떡이는 쇳소리로 변해 있었다. 내화 방화문 표면은 2차 공간 균열이 뿜어내는 칠흑 같은 기운에 침식되어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다. 물리적인 강철 빗장뿐만 아니라, 찢겨 나간 현실의 틈새가 문틀 자체를 옭아매고 있었다.
도진은 방진 점퍼 소매를 걷어 올렸다. 맨살 위로 드러난 팔뚝에 푸르스름한 정맥이 도드라졌다. 허공에 손을 얹자, 조금 전 환기 덕트가 찌그러지며 사방으로 흩어졌던 공기의 흐름과 왜곡된 공간의 잔류 궤적이 선명한 그물망으로 펼쳐졌다. 이미 사라져 버린 통로였지만, 대기가 그곳을 통과하며 남긴 마찰의 흔적은 아직 공간의 결 사이에 희미한 실선으로 남아 있었다.
'억지로 찢으려 들면 파열된다. 지나간 길을 되짚어 고정해야 해.'
도진은 숨을 가다듬으며 손가락을 비틀었다. 납작하게 으스러졌던 덕트 주변의 공간 잔류물을 움켜쥐고, 마치 구겨진 종이를 원래의 주름대로 펴내듯 조심스럽게 허공의 결을 당겼다. 지잉, 하는 이명과 함께 손가락 끝마디에서 살점이 타는 듯한 날카로운 작열감이 번졌다. F급 보조 각성자의 신체로 감당하기엔 벅찬 시공간의 뒤틀림이었지만, 도진은 턱을 악물며 시선을 떼지 않았다.
파지지직!
검은 균열 사이로 도진의 손끝에서 뻗어 나간 청록색 잔류 장력이 쐐기처럼 박혀 들어갔다. 공간의 왜곡선이 찰나의 순간 제자리를 찾으며 멈춰 섰다. 닫혔던 공기 통로의 잔류 경로가 강제로 비틀려 유지되자, 정체되어 있던 지하의 기압차가 요동치며 납작해진 배관 틈새로 신선한 외부 공기가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쐐액 하는 소리와 함께 배전실 안쪽으로 공기가 주입되는 감각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으윽……!"
도진은 반동으로 밀려나는 호흡을 삼키며 배전실의 두꺼운 손잡이를 향해 돌진했다. 공간의 뒤틀림이 일시적으로 멈춘 지금이 유일한 기회였다. 그는 방화문 경첩에 잔류 압축력을 걸어 지렛대처럼 튕겨냈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수백 킬로그램의 내화 방화문이 비명을 지르며 뜯겨 나갔다.
문이 열리자마자 뿜어져 나온 것은 질식할 듯한 유황 냄새와 뜨거운 수증기였다. 바닥에는 전선 피복이 녹아내린 웅덩이가 고여 있었고, 그 가장자리 구석에 세 사람의 그림자가 엉켜 쓰러져 있었다. 안전모를 쓴 중년 남성이 여섯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를 온몸으로 감싸 안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그 곁에는 탈진해 의식을 잃어가는 여성 직원이 벽을 짚고 있었다.
"정신 차리십시오! 구조대입니다!"
도진의 외침에 아이를 안고 있던 남자가 번쩍 눈을 떴다. 피와 그을음으로 젖은 눈꺼풀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에 절망 대신 믿을 수 없다는 경악이 번졌다.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아이의 등을 두드리며 울먹였다.
"사, 살아…… 살아서 문이 열렸어…… 은지야!"
02
제2장: 생존의 결속
배전실 내부의 잔류 마나 농도는 위험 수치를 한참 넘어서고 있었다. 전선이 타들어 가며 발생한 유독가스가 바닥에서부터 차오르고 있었다. 도진은 지체하지 않고 주머니에서 휴대용 정화 마스크를 꺼내 아이의 얼굴에 씌웠다. 쌕쌕거리던 아이의 가슴팍이 산소를 들이마시며 규칙적인 박동을 되찾기 시작했다.
"일어설 수 있겠습니까? 지하 3층에 임시 대기 구역을 마련해 뒀습니다."
도진의 물음에 벽에 기대어 있던 여성 직원이 비틀거리며 무릎을 세웠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던 찰나, 아이의 아버지인 남자가 도진의 어깨를 짚고 일어서며 반대편에서 동료를 굳세게 부축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갓 벗어난 이들의 눈빛에는 공포보다 살아야 한다는 원초적인 투지가 깃들어 있었다.
"갈 수 있습니다. 이 아이를…… 은지를 살려주셨는데 제가 주저앉을 순 없습니다."
남자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지만 흔들림이 없었다. 도진은 아이를 자신의 품에 단단히 안아 들고 점퍼 지퍼를 올려 바람을 막았다. 아이의 가느다란 팔이 도진의 목덜미를 꼭 쥐어 왔다. 미약하지만 분명한 생명의 온기였다.
치익, 치지직.
어깨에 고정된 무전기에서 하은의 거칠고 다급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지상의 소음과 고함이 섞여 전파를 타고 울렸다.
— 도진 씨! 생존자들은 확보했습니까? 지상 통제부가 기폭 카운트다운을 시작하려 합니다! 제가 스위치를 붙잡고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어요! 앞으로 3분 남았습니다!
"배전실 인원 세 명 전원 생존 확인했습니다. 지금 즉시 지하 3층 비상 집결실로 퇴각합니다. 3층 인원 일곱 명과 합류하면 곧바로 철수 경로로 이동하겠습니다."
— 3분입니다. 1초도 지체하면 안 돼요!
하은의 단호한 경고를 끝으로 무전이 끊겼다. 도진은 생존자 둘을 돌아보았다. 통로는 붕괴로 인해 잔해가 쏟아져 있었고, 수직 설비 사다리를 타고 3층으로 다시 올라가야 하는 험난한 길이었다. 탈진한 민간인 둘에게는 가혹한 등반이었지만, 남자는 망설이지 않고 사다리의 철제 난간을 움켜쥐었다.
"제가 먼저 올라가서 위에서 당기겠습니다. 박 주임님, 내 발목 잡고 올라와요!"
남자의 외침에 여성 직원이 이를 악물고 뒤를 따랐다. 공포에 질려 패닉에 빠지는 대신, 도진이 열어준 단 하나의 활로를 믿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도진은 허공의 잔류 장력을 둘의 등 뒤에 걸어 하중을 가볍게 띄워주며 맨 뒤에서 엄호했다. 셋의 호흡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수직 통로를 단숨에 주파했다.
쿵, 쾅!
지하 3층 비상 집결실의 철문을 열어젖히자, 안쪽에서 숨죽여 기다리던 인부들과 역사 직원이 일제히 튕겨 나오듯 달려왔다. 아이와 부상자들을 본 작업반장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살아왔구나…… 정 주임! 은지야!"
"반장님……!"
열 명의 조난자들은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이전까지 각자 다른 구역에서 죽음만을 기다리던 이들이, 도진이라는 구심점을 중심으로 하나의 단단한 생존자 연대를 이루어 내고 있었다. 서로를 부축하고, 짐을 나누어 메며, 도진의 입에서 떨어질 다음 명령을 향해 시선을 모았다.
03
제3장: 붕괴하는 심연
그러나 생환의 안도감은 채 몇 초를 가지 못했다.
쿠구구구구궁……!
발밑 지하 수십 미터 아래, 역사의 기초 암반을 떠받치고 있던 지각 전체가 거대한 아귀의 입처럼 비틀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진동과는 차원이 다른, 고막을 찢는 초저주파 파동이 지하 3층 집결실을 통째로 뒤흔들었다. 천장의 비상 유도등이 펑 소리와 함께 연쇄 폭발을 일으키며 암흑이 들이닥쳤다.
"꺄아악!"
"지반이…… 바닥이 꺼진다!"
던전 깊은 곳에서 규칙적으로 울리던 기괴한 박동은 단순한 마력 파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임계점을 넘어선 던전 핵이 스스로의 질량을 버티지 못하고 과부하를 일으키며 붕괴하는 파멸의 전조였다. 바닥의 균열 사이로 푸른빛을 잃은 탁한 암흑 마나가 화산재처럼 뿜어져 나왔다.
콰아아앙!
비상 집결실 바로 바깥, 조금 전까지 그들이 탈출로로 계획했던 노후 점검로의 입구가 수십 톤의 낙석 더미에 직격당해 완전히 짓눌려 버렸다. 철제 보강재가 엿가락처럼 휘어지며 흙더미 속에 파묻혔다. 지상으로 이어지던 유일한 환기구 통로마저 상판이 무너지며 단숨에 압살당하고 만 것이다.
완전한 고립. 지상 본부의 발파 카운트다운이 도달하기도 전에, 던전 핵의 과부하로 인한 자체 연쇄 붕괴가 지하 전 구역의 퇴로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다, 닫혔어…… 나가는 길이 전부 막혔다고!"
작업반장이 절망감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주저앉으려 했다. 열 명의 생존자들 사이에 다시금 짙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려던 찰나, 도진이 차분하지만 날카로운 목소리로 공간을 갈랐다.
"주저앉지 마십시오! 아직 안 끝났습니다!"
도진은 품 안의 은지를 아버지의 품으로 다시 넘겨주고는, 흔들리는 집결실 한가운데에 두 발을 굳건히 디뎠다. 그는 잿빛 방진 점퍼 주머니에서 양손을 완전히 꺼내 바닥을 향해 내리짚었다.
우웅, 파지지직!
도진의 눈동자 속에서 청록색 파동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그는 눈앞의 무너진 벽을 보지 않았다. 대신 지반 전체가 연쇄적으로 파괴되며 허공과 암반 속에 새겨 넣고 있는 거대한 '잔류 파동의 지도'를 읽어 내려갔다. 무너지는 돌과 찢어지는 철골이 밀어내는 압력의 궤적, 붕괴 에너지가 사방으로 튕겨 나가며 충돌하는 벡터들이 도진의 뇌리 속에 입체적으로 그려졌다.
모든 통로가 부서져 내리는 파국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유독 뒤틀린 압력을 견뎌내며 일정한 주파수를 유지하는 지하의 거대한 틈새가 하나 존재했다.
'저기다. 지하 배수 본관…… 수십 년 전에 콘크리트로 타설해 봉인했던 구 역사 배수관로!'
도진의 입술 사이로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핵의 과부하가 부숴버린 암반의 균열 사이로, 유일하게 지반의 하중을 버텨내고 있는 잊혀진 지하 혈관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도진은 집결실 바닥 한구석의 두꺼운 철판을 가리키며 외쳤다.
"배수관로로 들어갑니다! 저 아래가 유일하게 살아 있는 공간입니다!"
5화 끝 · 여기까지가 폴린이 써 둔 이야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