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1장: 수기(手技)의 빗장
목책 바깥으로 한 걸음 내딛던 진무원의 등 뒤로 차가운 쇳소리가 울렸다. 바닥에 떨어졌던 흑철검을 다시 쥐어 든 배도현의 호흡은 거칠었으나, 그 눈빛에는 물러설 수 없다는 감찰관의 고집이 서려 있었다.
"멈추십시오, 진형. 감찰각의 규율을 힘으로 꺾고 산문을 나선다면 그것은 명백한 탈문이자 반역입니다."
무원은 뒤돌아서지 않은 채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시선은 멀리 산 아래 운무에 덮인 길목을 향해 있었다. 품속에 닿은 비단 서찰의 모서리가 가슴을 짓누르는 듯 무거웠다.
"사문의 규율을 논하기 전에 대의를 먼저 보아라. 사부님께서 남기신 것은 반역의 징표가 아니라 문파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전언이다."
배도현은 검끝을 비스듬히 내린 채 흙먼지를 털어내며 다가왔다. 그의 손목에는 방금 전 무원의 수기법에 혈도를 눌렸던 붉은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사 장로님의 충심을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장로회의 승인 없는 은밀한 행보는 사문 전체를 위태롭게 만듭니다. 그 서찰에 무엇이 적혀 있기에 홀로 감당하려 하십니까."
무원은 천천히 돌아섰다.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으나 눈빛만은 바위처럼 묵직했다.
"장로회 내부조차 믿을 수 없기에 사부님께서 홀로 산을 내려가신 것이다. 내가 그 행방을 확인하고 진실을 사문에 고할 테니, 그때까지 감찰각은 산문의 문을 굳게 닫고 내부의 동요를 막아라."
배도현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감찰관으로서 지켜온 엄격한 율법과 눈앞의 수제자가 보여주는 흔들림 없는 기개 사이에서 그의 이성이 격렬하게 부딪치고 있었다.
"진형의 무위가 사문 정통의 삼재기운을 온전히 품고 있음을 방금 확인했습니다. 허나 규율을 어긴 책임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장로회에는 진형을 놓쳤다 보고하겠으나, 제 검은 진형의 뒤를 쫓을 것입니다."
무원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야말로 배도현이라는 사내가 사문의 규율과 개인의 신념 사이에서 내릴 수 있는 최선의 타협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마음대로 해라. 다만 내 걸음을 방해하지는 마라. 지금 지체하는 매 순간마다 사부님의 신변이 위험해진다."
무원은 등을 돌려 험준한 산길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발끝이 바위를 스칠 때마다 흙먼지가 이는 대신 부드러운 바람만이 일었다. 뒤편에 홀로 남겨진 배도현은 흑철검을 칼집에 거두어 넣으며 무원의 잔상이 사라진 숲길을 무거운 눈으로 응시했다.
02
2장: 운래객잔의 비밀 표식
천악산 자락을 완전히 벗어나자 거친 황토길 너머로 번잡한 저잣거리의 소음이 밀려왔다. 삼거리 목 좋은 곳에 자리 잡은 운래객잔은 강호 무인들과 보부상들이 뒤섞여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무원은 흑색 무복의 깃을 올리고 삿갓을 깊게 눌러쓴 채 객잔의 삐걱이는 목조 문을 열었다.
탁주 냄새와 기름진 고기 굽는 연기가 뒤엉킨 객잔 내부는 소란스러웠다. 구석자리에 자리를 잡은 무원은 점소이가 내온 맹물 한 잔을 앞에 두고 품속의 비단 서찰을 다시 떠올렸다. '운(雲)을 밟아 산을 내려서면, 취(醉)한 달이 주막 기와에 걸린다.' 단순한 은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문 내부의 암자표뿐만 아니라 객잔의 특정 위치를 지목하는 밀지였다.
무원의 시선이 객잔 천장의 대들보와 기와를 잇는 서까래 쪽으로 향했다. 어두컴컴한 구석, 달 모양으로 파여 있는 낡은 풍경(風磬) 아래 목재 기둥에 희미한 칼자국 세 개가 비스듬히 그어져 있었다. 청운검파의 독문 검결인 파천무결의 제삼식 입검세 흔적이었다.
"손님, 더 필요한 건 없으십니까?"
점소이가 마른 수건을 어깨에 걸치며 다가왔다. 무원은 탁자 위에 은전 두 닢을 내려놓으며 손가락 끝으로 탁자 바닥에 사문의 혈인 암호 첫 글자인 '운(雲)' 자의 획을 그렸다.
점소이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사소한 장사치의 눈빛이 아니었다. 손마디에 박힌 굳은살과 숨을 고르는 기식(氣息)으로 보아 몸에 무공을 익힌 자였다.
"동쪽 채랑 끝 계단 아래, 취객들이 드나들지 않는 창고가 있습니다. 찾으시는 물건은 그곳의 장물아비가 쥐고 있을 겝니다."
점소이는 은전을 소매로 쓸어 담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어조에는 이곳의 규율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무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부 사백한은 단순히 몸을 피한 것이 아니었다. 사문의 감시망이 닿지 않는 삼교구류의 거점에서 무언가 은밀한 거래를 성사시키려 했던 것이 분명했다.
목조 복도를 지나 퀴퀴한 곰팡내와 술 찌꺼기 냄새가 진동하는 지하 통로로 내려서자, 굳게 닫힌 낡은 철문이 무원의 앞을 막아섰다. 무원이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쇠막대기가 덜컹거리며 빗장이 풀리는 소리가 울렸다.
03
3장: 흑철 패와 습격자들
어두침침한 등잔불 아래에서 한 사내가 무원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구부정한 허리에 매부리코를 한 장물아비는 탁자 위에 놓인 기름때 묻은 장부를 덮으며 쉰 목소리를 냈다.
"청운검파의 수제자께서 이 누추한 지하까지 왕림하시다니, 천악산의 바람이 사납긴 사나운 모양이구려."
무원은 군더더기 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사부님께서 이곳에 맡겨 두신 물건을 찾으러 왔다. 서찰의 묵흔과 검흔을 이미 확인했을 텐데."
장물아비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나무 상자 밑바닥을 더듬어 손바닥만 한 쇳덩이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던졌다. 차가운 흑철로 벼려진 패에는 깊게 팬 검흔 세 줄과 함께 기괴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사백한의 애검 끝에서 뿜어진 청운검기만이 남길 수 있는 특유의 톱니 모양 흔적이었다.
"사 장로께선 이 흑철 패를 내게 넘기며, 서찰의 표식을 풀고 찾아오는 제자에게 넘기라 하셨소. 이 패는 보통 물건이 아니오. 정파와 사파의 경계선에서 비밀리에 통용되던…."
장물아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장 위의 목판이 부서져 내리며 서슬 퍼런 쇠사슬과 비수가 쏟아져 내렸다. 흑의를 입은 세 명의 괴한이 소리도 없이 지하 창고로 난입해 들었다.
"흑철 패를 넘겨라! 사백한의 숨통을 끊기 전에 그 잔당부터 없앤다!"
살기 어린 외침과 함께 뻗어 나온 비수가 무원의 목덜미를 겨누었다. 무원은 흑철 패를 품안으로 낚아채며 등 뒤의 장검을 뽑아 들었다. 맑은 검명이 좁은 지하실을 진동하며 푸른 검막을 형성했다.
괴한들의 무공은 정통 문파의 그것이 아니었다. 독기가 서린 흑색 도기와 변칙적인 궤도를 그리는 암수가 무원의 사지를 옥죄어 왔다. 그러나 무원은 당황하지 않고 사문 정통의 검초를 질서정연하게 펼쳐냈다. 칼날이 부딪칠 때마다 튀는 불꽃 속에서 무원은 적들의 도법에 사문의 무공을 파훼하기 위한 치명적인 상성이 담겨 있음을 직감했다.
스승은 이 위험을 감지하고 홀로 산을 내려왔던 것인가. 흑철 패에 담긴 진실을 둘러싸고, 무원의 검끝이 어둠 속에서 푸른빛을 더욱 맹렬히 뿜어내기 시작했다.
2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