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린검집 속의 비사 목차

무협 · 4화 / 5화 · 약 5분

제4화: 흑영애의 비검흔

검집 속의 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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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흑영애의 비검흔

천악산 서편으로 뻗은 암벽은 살을 에는 삭풍과 짙푸른 운무로 뒤덮여 있었다. 발을 헛디디면 천 길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치는 흑영애(黑影崖)의 험준한 산세는 왜 이곳이 강호 무인들에게 금역으로 불리는지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진무원은 등에 멘 장검의 칼집을 단단히 여미고 서릿발 맺힌 바윗길을 올랐다. 그의 뒤편에서 검은 철릭을 펄럭이며 따라붙은 배도현 역시 흑철검 자루를 쥔 채 사방의 흉흉한 기척을 예민하게 살폈다.

절벽의 중턱에 이르자 바람의 결이 기괴하게 비틀리며 귀곡성을 내질렀다. 안개 너머로 병풍처럼 둘러선 기암괴석들이 자연적인 지형이 아니라 인위적인 포진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무원이 멈춰 서서 가슴속 삼재기운을 운용해 전방을 꿰뚫어 보았다. 석벽 곳곳에는 무수한 검흔이 깊게 패어 있었는데, 그 형상이 놀랍게도 사문인 청운검파의 금지된 절초 흔적이었다. 정통의 궤적을 벗어나 상대를 일격에 절명시키도록 변형된 잔혹한 검로가 바위 표면에 생생히 새겨져 있었다.

"진형, 보입니까. 이것은 이십 년 전 파문당한 사문의 파계 제자들이나 쓰던 혈검술의 자국입니다." 배도현이 굳은 낯빛으로 검흔을 손끝으로 훑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어째서 이런 금지된 궤적이 흑영애 진입로의 기문진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까." 무원은 대답 대신 품속의 흑철 패를 만져보았다. 사백한이 남긴 흑철 패의 톱니 모양 검흔과 절벽에 새겨진 파혈의 칼자국들이 마치 하나의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듯 서늘한 공명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때였다. 바위 틈새에서 피어오른 짙은 안개가 소용돌이치며 두 사람의 오감을 옥죄어 왔다. 밟고 서 있는 바닥이 허물어지는 듯한 착각과 함께 사방의 암벽이 살아있는 칼날처럼 좁혀들었다.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내력을 실어 배열한 기문둔갑(奇門遁甲)의 살진이었다. "마음을 흐트러뜨리지 마라. 사문의 정통 도가 심법으로 호흡을 맞추어야 한다." 무원이 나지막이 경고하며 가부좌를 틀 듯 보법을 단단히 딛고 단전의 삼재기운을 순행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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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운무 속의 노검객

배도현도 망설임 없이 검을 가슴팍에 세우고 청운검파의 독문 심법인 청심결(淸心訣)을 끌어올렸다. 두 무인이 발산하는 순양의 도가 기운이 합쳐지자, 혼탁하게 일렁이던 살진의 안개가 서서히 찢겨 나가며 본래의 산길이 드러났다. 팔괘의 이치를 거스르던 기석들이 제자리를 찾고, 벼랑 끝 동굴 입구로 이어지는 좁은 석교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석교의 끝, 깎아지른 바위 위에 한 노인이 백발을 흩날리며 버티고 서 있었다.

노인은 낡아 해어진 회색 도포를 걸치고 있었으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패도는 흡사 굶주린 맹수와 같았다. 푹 꺼진 눈확 속에서 번뜩이는 안광은 청운검파의 검식을 지닌 두 청년을 향해 지독한 증오를 토해내고 있었다. "청운의 허울 좋은 껍데기들이 기어이 여기까지 기어들었구나. 삼십 년 전 내 사지를 꺾어 이 절벽 아래로 내던진 것으로도 모자라, 또다시 내 숨통을 끊으러 왔단 말이냐!" 노인의 거친 호통과 함께 주변의 자갈들이 부르르 떨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우리는 장로회의 자객이 아닙니다! 스승님이신 사백한 장로님의 행방을 쫓아 이곳에 당도했습니다!" 무원이 물러서지 않고 우렁찬 내력으로 소리쳤다. 사백한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노인의 험악하던 눈빛이 일순 멎었다. "사백한……? 그 우직하고 미련한 놈의 제자라고?" 노인의 시선이 무원의 당당한 풍채와 단전에서 은은히 뿜어져 나오는 삼재기운의 맑은 빛을 훑었다. 한 치의 비열함도 없는 곧은 기개는 노인이 기억하는 사백한의 젊은 시절 그 모습 그대로였다.

노인이 거두어들이지 않은 살기를 띤 채 비틀거리며 한 걸음 내디뎠다. "그놈은 조금 전 이곳에 들렀다 갔다.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절벽을 기어 올라와 숨을 헐떡이더군. 연가의 사냥개들과 문파의 그림자들에게 쫓기면서도, 오직 제자가 그 패를 무사히 손에 넣기만을 빌며 산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사실에 무원의 가슴이 찢어지는 듯 요동쳤다. 괴한들의 말대로 스승은 함정에 빠져 유인당한 것이 아니라, 제자에게 진실의 열쇠를 넘겨주기 위해 스스로 미끼가 되어 사지로 뛰어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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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삼십 년의 묵은 밀약

배도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감찰관으로서 자신이 문파의 뜻이라 믿고 쫓았던 모든 일들이 거대한 기만이었음을 직감한 탓이었다. "스승님께서…… 스스로 미끼가 되셨단 말입니까?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위험을 무릅쓰신 겁니까!" 무원의 목소리에 억누를 수 없는 격정이 묻어났다. 노인은 메마른 웃음을 터뜨리며 품속 깊은 곳에서 낡고 누렇게 변색된 양피지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들었다.

"삼십 년 전, 청운검파 장로회는 문파의 세를 불리고 강호의 패권을 쥐기 위해 흑도 사파의 거두들과 은밀한 밀약을 맺었다. 정파의 명예 뒤편에서 사파의 자금을 끌어쓰고, 그 대가로 사파 무리의 살인을 눈감아주는 추악한 결탁이었지. 내가 그 진실을 밝히려 하자 장로회는 나를 반역자로 몰아 이곳 흑영애로 추락시켰다." 노인의 거친 손이 떨리며 양피지를 무원을 향해 던졌다. 무원은 허공을 가르는 두루마리를 낚아채듯 받아냈다.

두루마리를 펼치자 사파의 독문 혈인과 함께 청운검파 장로회의 직인이 선명하게 찍힌 밀약 문서가 드러났다. 정파 오대세가인 하남 연가의 가주 직인까지 나란히 박혀 있는 그 문서는, 문파의 존립 자체를 뿌리부터 뒤흔들 치명적인 뇌관이었다. "사백한은 삼십 년 동안 홀로 그 짐을 짊어지고 증거를 찾아 헤맸다. 그리고 이제 장로회가 자신들의 부정을 완전히 덮기 위해 연가와 결탁하여 사백한을 제거하려 드는 것이다." 노인의 침통한 증언이 흑영애의 삭풍을 타고 비수처럼 폐부를 찔렀다.

무원은 떨리는 손으로 밀약 문서를 갈무리하여 품속 깊숙이 흑철 패와 함께 넣었다. 스승이 왜 처소를 비우며 혈인 암호를 남겼는지, 어째서 홀로 사문의 칼날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산문으로 되돌아갔는지 명백해졌다. 배도현이 흑철검을 쥔 손을 바르르 떨며 바닥을 응시했다. 은둔 고수는 무원의 어깨를 묵직하게 짚으며 갈라진 목소리로 읊조렸다. "가라, 소년이여. 그 밀약 문서는 사문의 역사를 송두리째 무너뜨릴 독이다. 네 스승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

4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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